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의 '말'은 천금 같아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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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가권력 남용 범죄에 대한 민.형사상 시효의 배제 또는 조정'을 언급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여권의 총체적 난맥상을 뭉뚱그려 보여준다. 시스템의 부재와 당.정.청의 조율 미숙, 대통령의 독주 등의 문제점이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 뿐 아니라 국가원수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말은 영향력이 워낙 커서 절제되고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의 말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러운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대통령의 발언 내용에 대해 청와대나 여당 내에서 찬반이 나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그 해석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한심하다. 우선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청와대가 헷갈렸다. 발언 당일 처음에는 "해방 이후의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범죄가 대상"이라고 했다가 논란이 일자 "논의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원칙적으로 장래에 관한 것"이라고 물러섰다. 노 대통령도 발언 다음날 "형사적 소급처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청와대 내부에서 사전에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청와대가 사전 독회 과정에서 위헌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며, 알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직무를 유기한 셈이다.

열린우리당의 태도는 더욱 희극적이다. 대통령의 발언 당일엔 "과거사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이 선행돼야 한다는 취지"라고 옹호하다가 위헌 논란이 거세지고 '형사적 소급처벌이 아니다'는 대통령의 해명이 나오자 "미래에 대한 시효 배제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대통령의 말에 따라 여당이 갈팡질팡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여당의 역할이 고작 대통령의 말을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인가.

대통령의 발언은 천금 같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참모를 두고 충분한 검토를 거치는 게 필요하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사전에 정치적 파장과 법적 문제 등에 대해 점검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