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계와 융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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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것은 철을 가야지방으로부터 수입했다는 증거가 된다. 가야지방에서 철이 많이 생산된 것은 잘 알려져있는 『위지』 한전 정신조에 『나라에 철이 나서 한(마한)·예·왜와 이군(악낭·대방)에서 무역하여 갔다』는 기사로써도 증명된다. 철이 고대의 정복 국가에 절대적인 필수품이었던 것은 주지의 일이다.
5세기이후의 일본고분에서는 각종 마구·갑위(갑옷과 투구)등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것들도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거의 같다. 특히 철제 갑위는 최근 가야고분에서 많이 발견되어 일본과의 관계를 주목하게 됐다.
또 5세기이후 일본의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토사기(하지끼)와 수혜기(스에끼)의 두종류가 있다. 토사기라는 것은 적갈색 연질토기이며, 수혜기라는 것은 회청색 경질토기를 말한다. 그런데 이 두가지 토기는 그 제법과 기형이 모두 가야토기와 꼭같은 점을 볼수있다.
가야토기의 어떤 것은 이웃의 신라나 백제의 토기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 혼동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가야토기의 특징적인 기형을 분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일본의 토사기와 수혜기가 한반도의 어느 지역으로부터 받아들여졌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일본 고분에서 전기의 묘제는 원분과 전방후원분이 있는데,그 입지조건과 내부구조가 가야묘제의 영향을 말해준다. 즉 입지조건은 구릉의 능선에 축조됐으며, 내부구조는 수혈식 석실인 것이 특징이다.
위와 같이 일본의 고분시대 전기 즉, 대화국가건설기에는 거의 모든 문화가 가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점은 대화국가의 지배세력이 어떤 민족이었던가를 시사한다.
일본민족의 기원이나 국가형성에 대한 견해중에 「일본열도삼국분국설」이나 일부 논자중에 구주지방에 백제계 이주민이 건너가서 정치집단을 이룬 일이 있는 듯이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고고학적자료를 도외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생시대에서 고분시대에 걸쳐서 구주지방에는 유적이나 유물에서 그러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백제가 일본에 문화적 영향을 미친 것은 5세기 이후, 특히 6∼7세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백제계 이주민은 대화(나량)지방과 하내(지금의 대판)지방에 가장 많이 집단을 이루어 거주했고, 일부는 근강(지금의 경도)지방과 관동지방에 분산됐다.
신라는 고신라시대에는 일본과 적대관졔에 있었으므로 문화적·씨족적 관계가 거의 없었으며, 고신라말에서 통일기에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지리적으로 동해안에서 일본의 산음지방에의 교통이 있었던 듯 하여, 일찌기 출운(이즈모)지방에 신라계의 정치집단이 형성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운지방은 고대에 「옥작부」(직업집단의 일종)라고 하여 곡옥 등의 옥제품의 제조에 능했던 것은 역시 신라로부터의 전통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운세력이 대화정권에 대해 늘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혹은 한반도에서의 신라와 가야의 대립관계의 연장인지도 모르겠다.
미생시대로부터 고분시대초에 걸쳐서 가야지역으로부터의 일본열도에의 이주는 단속적으로 이루어진것이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알수있다. 그리하여 대화국가건설의 주도세력은 앞에서 거듭 말한바와 같이 가야로부터의 이주민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일본열도에 정착하여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숫적으로 우세하던 남방아시아계와의 혼혈이 행해지고, 언어·습속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한반도로부터의 출자는 잊어버려지고, 완전히 일본민족으로서의 특성이 형성됐던 것이다. 김정학<동국대교수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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