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사건⑦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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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진보당사건 최초의 논쟁점이던 평화통일론은 재판부와 검찰 사이에서 보는 눈이 달랐다. 그리고 그런 견해의 차이가 심문을 오래 끌게 만들었다. 4월10일의 제4회 공판은 진보당 간부들을 상대로한 통일론의 심문이었다.
진보당 통일연구위원외가 마련한 14개조의 통일정책에 대해 다른 간부들은 진보당의 강령이나 선언문과는 어긋나는 것이며 당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통일방안을 작성한 김기철씨도 이 안은 공식기구에서 검토된 일이 없는 사안이라고 말해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한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죽산의 논문과 김기철의 통일방안이 같은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를 진보당의 북괴동조로 규정했다.
최근 2년반동안 거동도 할수 없어 병석에 있는 김기철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만든 통일방안이 문제였는데 검찰은 이것을 사실상의 당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당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읍니다.
그런데 제네바회담을 계기로 정부·유엔·영국 그리고 북괴의 통일방안이 몇달전에 나와 있었지요. 따라서 진보당으로서도 내용이 있는 구상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는것이 나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구체적인 평화통일방안을 마련했던 것인데 당간부들이 재판정에서 나를 몰아세우기도 했습니다. 내가 사실대로 나의 사안일 뿐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죽산이 재판장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하더니<나는 김기철의 통일방안을 지지했고 미처 당정책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 안이 진보당의 통일정책을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이렇게 증언을 하더군요. 그때의 상황에서 죽산이 그런 말을 할수 있었던것은 그만큼 죄될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던것 아니겠읍니까.』
다만 진보당의 평화통일이란 원칙에 대해선 모두가 소신이라고 증언했다. 그 일부를 옮기면
▲재판장-57년 여름 진보당 교양강좌에서 김피고는 6·25는 괴뢰가 남침해왔다고 하지만 상세한 것은 모를 일이라고 말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김달호-그때 경찰이 사실과 달리 기록을 한것이 밝혀졌는데 검사가 바빠서 그랬는지 기록도 안 읽고 그대로 공소장에 기재한 것같다. 그날 나는 북괴는 남침까지 하였으니 평화통일의 주도권이 없는 것이며 대한민국이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다고 했다.
▲변호사-김피고의 발언 내용은 압수된 기록으로 사실이 입증된다.
▲검사-자유총선거란 남한에서까지 동시에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현대한민국의 헌법은 어떻게 되나.
▲윤길중-검사질문, 그것이야 말로 나도 꼭 말하고싶은 문제였으며 이사건과 관계되는 핵심을 차지하고있는 것이니 5분간만 진술할 시간을 달라.
▲검사-좋다.
▲윤길중-전략…우리가 펑화적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행 헌법과 유엔감시란 원익밑에서 하자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이미 제네바회의에 참석한 변영태씨가 유엔감시하의 한국통일방안 14개원칙을 주장했을 때 북괴가 그자리에 참식해 있었던것과 같이 우리는 유엔을 통해서는 북괴뿐 아니타 소련도 상대해서 남북통일을 이룩하는 협상을 할수있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복잡한 정치를 하고있는 일개 정당의 정책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검찰태도는 이해할수 없다.
통일론은 결국 무죄로 확정됐다. 이런 판결에 대해 당시의 검사와 판사는 지금도 견해를 달리했다.
▲조인구씨(당시 담당검사)-55년 무렵 한국정계에 제3세력이 등장하자 김일성은 이들 제3세력이 그들의 대남전략에 합치된다고 보고 간첩을 남파하고 있었다. 그럴때 죽산이 발표한 「평화통일에의 길」은 당시로는 혁신적 슬로건으로 이북의 주장과 비슷했다. 당시 6·25직후 잿더미 위에서 그런 과격한 주장을 편다는것은 납득할수 없는 것이었다. 중립국 감시하의 총선거란 이북의 주장 그대로였고 남북 동시선거란 48년 유엔 결의에 의해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결국 검찰은 이글을 문제삼아 진보당을 구속했다.
▲이병용씨(당시 배석판사)-당시 정부는 북진통일을 내세웠지만 일반 국민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 국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국민들의 호응을 받을수 있었고, 이것이 보수진영서 볼때 하나의 위험내지 위협세력으로 등장하리란 우려를 갖게한 것이 아닌가 판단됐다.
진보당의 성격규정도 또 하나의 쟁점이었다. 기소후에 발표된 양명산사건을 의식한 진보당 간부들은 죽산은 공산수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달호-조봉암씨와는 가족적인 관계에 있는 장평상씨가 말하기를<공산당이 남침하면 나는 괴뢰에 몇년의 징역을 받으면 될지 모르지만 조봉암씨는 그가 과거 공산당을 배반한 일이 있기 때문에 반역죄로 무기내지 사형의 중형을 괴뢰가 내리게 될것>이라고 조씨의 반공사상이 철저하다는 것을 설명하고나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l·4후퇴때 유엔대표로 미국에 가면서 내 가족들을 조봉암에게 맡겼다. 괴뢰가 부산까지 쳐내려온다면 일본까지라도 제일 먼저 도망칠 사람이 바로 조씨였기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 조봉암씨를 중심으로 야당세력규합운동을 같이 추진해 보는것도 결코 무의미한것이 아니다>라고 장씨가 내게 수차 권했기 때문에 조씨와 접촉하게된 것이다.
이날 조규희·조규택등 다른 피고들도 진보당 참여경위를 설명하면서 죽산을 변호했다. 그러면서 『진보당의 평화통일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결정적 승리를 전제로 한다는것이 당헌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대한민국변란을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당했다는 검찰측 공소사실은 전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특히 이날 공판이 끝날 무렵 검사출신이기도 한 김달호피고는『검사는 이 사건의 공소를 취하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나도 법의 운용을 알지만 죄도 없는 사람을 석달동안이나 간첩죄로 몰아넣었으나 하등의 증거도 없으니 이것이 무엇하는 것인가. 만약 공소를 취하한 후라도 증거만 생기면 다시 공소할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기도했다. 그만큼 평화통일론이나 진보당결당등 그 무렵의 공소사실에서 피고들은 자신만만하게 그들 입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재판이 있은 나흘 후 진보당엔 불리한 사태가 일어났다.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보내는 메모를 전달한 혐의로 서울형무소의 이동보 임신환 두 간수부장이 경찰에 구속된 것이다.
신문들은 경찰고위간부의 말을 인용, 지난3월23일 조의 심부름으로 문제의 쪽지를 건네준 이동신은 그 사례비로 1백만권을 받기로 했음을 시인했으며 임에게서 그쪽지를 압수, 증거품으로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또하나의 미묘한 쟁점이 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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