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누구를 위한 할인규제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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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호 02면

21일부터 개정된 도서정가제가 시행된다. 신간·구간 구분 없이 발행된 모든 책의 할인율을 최대 15%(포인트 적립 5% 포함)로 제한하는 할인 규제다. 종전엔 실용서·초등학습 참고서와 발간된 지 18개월 지난 책은 서점이나 출판사가 알아서 싸게 팔 수 있었다. 발간 18개월 미만 책은 최대 19%까지 깎아줄 수 있었다. 새 규제는 지나친 가격경쟁을 막음으로써 피폐해진 동네 책방과 출판사를 도와 출판 생태계를 복원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종전보다 비싸게 책을 사야 한다. 이는 책 수요를 억제하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도서정가제는 궁극적으로 국민이 책을 많이 사 보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 책 판매가 되레 준다면 출판 생태계고 뭐고 다 무너지기 쉽다. 결과적으론 소비자의 후생(厚生)만 나빠진다.

 제품의 할인을 규제해 소비자들이 싼값에 사지 못하게 막는 나라는 거의 없다. 자본력을 동원한 과도한 할인, 즉 부당 염매(廉賣)는 공정거래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데, 우리는 별도의 할인 규제를 두고 있다. 국민은 이미 ‘이동통신 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을 통해 계속 피해를 보고 있다. 단통법은 차등 보조금의 폐해를 없애 고객이 공평하게 혜택을 받도록 함으로써 통신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명분에서 나왔다. 하지만 시행 후 소비자들은 더 비싼 값에 휴대전화를 사야 했다. 통신비 절감은커녕 온 국민이 ‘호갱(호구+고객)’이 된 꼴이다. 단말기 판매는 급감하고, 상당수 이동통신 대리점은 폐업 위기에 내몰렸다. 시장의 자연스러운 경쟁을 막은 결과 소비자 부담 증가와 제조·유통 업체의 경영 위기가 이어졌다. 아이폰6 불법 보조금 파동도 경쟁을 막자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런데도 관료들은 시간이 가면 국민이 다 잊어버리고 적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 듯하다.

 이는 규제 혁파를 주창한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 기업의 생산·서비스 활동을 보장하고 국가경제 발전을 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관료들이 한 일은 뭔가. 청부입법으로 할인 규제를 덕지덕지 만들어놨다. 규제 탓에 경쟁이 위축되면 소비자에게 돌아갈 이익이 판매자나 생산자에게 넘어가는 법이다. 단통법으로 소비자들이 비싼 비용을 치르는 동안 과실은 이동통신사가 대부분 가져갔다. 새 도서정가제 역시 시장을 위축시키거나 소비자 부담을 늘릴 우려가 많다. 관료들은 새 법과 제도 뒤에 숨은 채 규제 권력을 확대하는 ‘전과’를 올렸다.

 정부의 역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촉진하는 것이다. 단통법 파동에서 보듯 제품 가격을 낮추는 건 규제가 아니라 공정한 시장경쟁이다. 정부는 보조금 제한이나 통신요금 인가제라는 규제를 없애고 공정하게 요금 경쟁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단통법은 폐지하거나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새 도서정가제 역시 시행 이후 부작용을 주시하면서 과감히 손봐야 한다. 진정 소비자 이익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규제를 풀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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