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반민시위」(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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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민 법 시행을 위해 국회는 9월 하순「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각 도에서 1명씩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의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구 의원으로 진용을 짰다. 그러나 10월 들어 공산반란이 도처에서 발생해 새 나라를 뒤흔들었다. 10월19일의 ?-순 반란사건에 뒤이은 대구주둔 6연대의 반란사건 등이 남부지방을 강타해 치안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새 정부의 기초를 무너뜨리려는 공산당의 파괴행위였다.
정부는 국방군 안의 공산당 푸락치 조직을 포함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침투해있는 남노당 지하조직의 책출에 총력을 쏟았다. 국회도 시국대책으로 온 날을 보냈다. 그런 과정에서 정부와 국회가 격심한 대립을 보이기도 했고, 국회 내에서도 한민당 중심의 보수 세력과 소장파 사이의 견해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 무렵 중요쟁점이던 주한외국군 철수문제와 국가보안법 심의를 둘러싸고서였다. 결국 11월20일 국가보안법이 통과됨으로써 공산당의 사의혼란에 대처하는 일련의 작업이 끝났다. 격동의 정국이 한고비를 넘어선 것이다.

<언론단속법 없다>
국회가 반민 법에 다시 눈길을 돌리면서 반민 법 반대에 앞장서 있는 대한일보를 문제삼았다. 이른바 9·23반공대회를 주최해 반민 법 반대에 앞장서있던 대한일보는 11월 들어서는 반민 법 반대 캠페인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 논란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자.
△윤병구 의원=정부는 앞서 조선통신사와 국민신문사에 대해 반국가적 기사를 게재했다해서 폐간 조치했다.
그런데 지금 반공을 내세워 반민 법을 집행하려는 국회를 말살하려고 연일 민중을 선동하고있는 대한일보를 정부는 어째서 그대로 두는가.
△김동성 공보처장=대한일보는「공산당 매국노의 앞장이 국회의원을 숙청하자」라는 큰 제목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래 하드 끔찍해서 주의를 시켰다.
그런데 그후도 계속해서 국회의원에 관한 것이 있어서 사장을 불러 얘기를 들으니까 국회 전체를 모독한 것이 아니라 국회 안에 몇 사람을 지칭한 것이라는 변명이 있었다. 현재 언론 단속법은 광무11년의 신문지법밖에 없다. 공보처는 법률을 초안했는데 아직 통과가 되지 않았다. 국회에서 법률만 세워 놓으면….
△김동명 의원=조선통신이나 국민신문에 대해서는 광무 신문지법을 써서 폐간시키고 대한일보는 그 법을 못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 처장=대한일보에 대해서 그 법을 적용 못한다는 말은 안 했다. 적용한다면 그 법률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혜영 의원=대한일보에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 집에는 순경4∼5명을 보내 경호를 해주고있다고 들었다.
여기 이 신문을 보면 대구경찰서장이 이 신문의 상임이사로 되어있다. 신문에 이런 글을 쓰던 장본인을 하필 대구서장으로 채용하는 등 정부가 이런 보도를 조종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정심 의원=대한일보의 이종영은 내무부 촉탁으로 기독교 탄압에 앞장섰고 아현 마루턱의 성결교회를 접수해 학교를 경영한다고 나선 것 등 악질 민족반역자다. 또 수도경찰청에 이구범이 들어가고 노덕구이가 어찌해서 건재하는가….
국회는 12월초 특별경찰대, 검찰 및 재판부도 따로 구성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에 근거해 특별기구를 구성했다. 반민 법에 관해서 만은 입법·조사·집행을 모두 국회가 떠맡은 것이다. 다만 특별재판부장엔 김병노 대법원장, 특별검찰부장엔 권승렬 검찰총장을 선임했다. 반민특위는 각도의 조사부까지 구성을 끝낸 49년1월5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친일파들은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최대의 위협은 정부내의 친일경력자들, 특히 경찰의 방해공작이었다. 그들은 일부 친일기업인의 지원을 얻어 막대한 공작금도 뿌리는 도전세력이었다. 이에 대한 김년수씨(당시 경성방직사 주로 친일기업인으로 지목됐음)회고. 『반민 법 해당자들은 8·15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 각오한바 있었으나 다행히 미군정3년간의 후덕으로 심판의 날을 면해왔다.
그랬다가 처단이 닥치자 당장 죽음이 닥쳐온 듯이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까 백방으로 손을 쓰고 사람을 내세워 부산을 떨었다.
특히 자발적으로 일제에 아부, 충성해 민족의식 말살의 노예정책에 앞장섰던 사람들, 독립지사와 애국동포들을 검거·투옥·고문해오면 그들이 어떻게 감히 해방된 조국과 겨래 앞에서 속죄의 눈물은커녕 기고만장, 활개치며 돌아다닐 수 있겠느냐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심정이요 울분이었다.』
언론인 김을한씨의 회고. 『미 수사기관인 CIC는 서울에 사무소를 설치하자마자 즉시 해방에 대한 일반민중의 여론을 조사하고자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그 중에도 해방 전 일본에 협력했던 소위 친일파들의 동태와 그들의 생각을 알아내려고 면밀한 조사를 했었다.
하루는 CIC의 유일한 한국인간부인 계순용을 만났더니 전 매일신보사장「가나까와」(김천·이성근)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이성근은 솔직>
그 연유를 물었더니 보통 친일파들은 발뺌하기에 급급해서「내가 친일을 하고 싶어서 했겠느냐? 죽지 못해서 했다」혹은「비록 총독부 벼슬은 했을 망정 마음만은 그렇지가 않았다」고 변명을 하고 심지어 고등계형사를 다닌 자도「형사노릇은 했지만 실상인즉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했노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데「가나까와」를 신당동 매일신보 사택으로 찾아갔더니<나는 본디 황해도의 가난한 농가의 자식으로, 학교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했는데 그러한 내가 도지사가 되고 신문사 사장으로까지 출세를 한 것은 오로지 일본제국의 덕택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이 아니면 오늘의 나는 없으며 그 일본이 망했으니까 나도 함께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시오>라며<내가 바로 친일파>라고 담담하면서도 떳떳하게 말하는 그 배짱에는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지더라고 하였다. 친일파도 그쯤 되면 미워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 그때 이순용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이성근은 총독부 기관지의 사장일 뿐더러 평북 고등과정을 지내기도 해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해방되던 날부터 문을 굳게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일제에 붙어서 살아오던 크고 작은 친 일본 자들이 살 구멍을 찾아서 제각기 갈팡질팡할 때에도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태연하게 조용히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해공작도 거셌지만 검거와 재판은 신속히 이뤄졌다. 1월8일부터 검거선풍이 일어났고 조사를 거쳐 3월28일부터는 재판이 시작됐다. 중요재판케이스를 살펴보자.

<궁색한 변명 안 해>
첫 번째로 심판대에 오른 사람은 고종의 당질이며 자작 작위를 받은 이기용. 그는 반민 법 제4조2항「중추원부의장·고문 또는 참의 되었던 자」에 해당되었다.
-고종황제의 5촌 조카인가.

<그렇다.>
-생활은 어떤가.

<아주 곤란하다.>
-귀족원 의원은 언제, 어떤 경로로 되었는가.

<해방되던 해 4월 아부총독이 자꾸 오라고하여 죽은 이항구 대신 이왕직 장관을 하라는 것인 줄 알았더니 그 자리에 윤치호씨도 있었는데 예비교섭도 없이 의원직을 맡겼다.>
-귀족의원은 누구누구가 되었나.

<윤치호·박중양·한상룡·이진호 등이다.>
-일본의 귀족원 의원이라면 대개 황족·화족·학사원 의원·세금다액납부자 등인데 피고는 어떤 조건에서인가.

<아마 창덕궁을 대표해서 또는 친척대표로서 시킨 것으로 본다.>
-조선사람으로 작위를 받은 자는 몇 명인가.

<7∼8명이 된다.>
-피고는 한일합방의 경위라든가 민비 살해사건,5조·약7조약·경찰권이양·고종황제밀사사건 등을 아는가.

<안다.>
-피고는 한일합방의 일본이 약탈을 일삼던 것을 아는가.

<잘 안다.>
-자작을 언제 탔으며 돈을 얼마나 받았는가.

<합방직후 22세에 받았고 돈은 한 3만원 받았으며 이 내가 사용치 않고 교육사업에 썼다.>
-송병준은 1억 원, 이완용은 3천 만원에 나라를 팔겠다고 했으며 일황이 합방 때 3천 만원을 뿌려 이 돈이 나라를 판돈이라는데 피고가 받은 3만원도 이 속에 드는가.

<잘 모르겠다.>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죽어 가는데 그대들은 평안히 살고 있으니 조금도 괴롭지 앉았는가.

<마음으로 대단히 괴로 왔다.>
재판도중 재판장이 일제로부터 받은 금술 달린 예복과 예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이며<이것이 작위를 받고 영광으로 생각해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인가>라고 묻자.<그저 한번 입어본 김에 찍어보았다>고 대답,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씨는 황족으로서 친일에 끌려갔을 뿐 크게 활동한 것은 없었고 궁색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역시 과거를 뉘우쳤다는 점에선 김행수씨가 가장 모범이었다.
경성방직 사주였던 그는 한국인으로선 으뜸의 실업 인으로 한·일인소유 15개 사의 중역이었고 그런 재력이 바탕이 돼 도청의원·중추원참의·임전보국전 의간부·주경성 청주국 총영사를 지냈다. 그는 1월21일 체포되었는데 스스로의 친일행위를 숨김없이 털어놓고 참회했다. 사업을 하려니까 총독부 정책에 순응하고 기관에서 맡기는 직책을 본의 아니면서도 맡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러나 사업을 하려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변명일 뿐이고 조선인으로서 부끄러운 행위를 했다면서 법에 의한 응분의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반민특위 검찰부는 김씨의 이런 참회의 태도를 좋게 보아 체형 없이 재산일부 몰수 및 공민권정지라는 가장 가벼운 구형을 했었다.
그리고 49년8월6일의 최종재판에서 이춘호 재판장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무죄로 풀려난 후에도 그의 사업체 운영에서도 손을 떼고 2선으로 물리나 내내 은둔생활을 함으로써 과오에 대한 참회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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