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4)제77화 목각의 혈?60년(42)「전조선 프로권투연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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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연합회와 협회는 결국 빗발치는 여론 앞에 어절 수 없이 굽혀「전조선 프로권투연맹」으로 통합했다. 그러나 연합회 측의 탈퇴인사가 속출한 것은 협회를 이끌던 황을수의 위력이 막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을수는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 라이트급에 출전했으나 불운하게도 1회전에서 금메달리스트와 대결, 아깝게 판정패하고 말았다. 황을수는 은퇴 후 프로권투의 매니저로 활약, 국내권투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따라서 선의의 취지로 출발했던 두 단체가 사사건건 마찰을 빚자 황을수의 친구와 후배들이 연합회를 탈퇴하게된 것이다.
1947년 11월에 창립된 전조선 프로권투연맹은 구성 멤버들 중 유력 인사가 많았다. 고문에 안재홍 양장환 방응모 이선근, 회장에 문현승, 상무에 박용만 전혜수, 이사에 정면현 김기환 김진용 양정모 김영복 방순갑 박만식 김만진 홍연호 최양인 홍응규 이룡규, 평의원에 정복수 김춘만 이찬우 권순양 허근 등이다. 특기할 것은 황을수가 스스로 통합연맹의 임원에서 제외된 것이다.
해방 후 프로권투가 본격적인 흥행에 들어간 것은 1947년부터다. 이해 5월26일 창경원 특설 링에서 동경에서 귀국한 서재석 조용덕 오경식 등이 국내선수들과 중앙권투 회 및 전국권투연합회 후원으로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대진은 송방헌-서재석, 양정모-조용덕, 이경렬-오경직의 8회전, 김준호-강창희의 6회전, 임철재-김상회의 4회전 경기였다.
또 이해 9월 서울 운동장 육상 장에서 국군총사령관 배 쟁탈 국군위안권투대회가 군기사령부주최, 전국권투협회 후원으로 송방헌-서재석, 박제건-박광천의 10회전, 신현기-김계윤의 8회전 경기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처음으로 2만 명이란 미증유의 관중이 몰려든 최대흥행경기는 같은 해 10월14일 서울 운동장 육상 장에서 열린 한미권투대항경기다.
신한권투회 주최, 전국권투연합회 후원으로 열린 이 대회는 몰려든 관중들을 경리하기 위해 기마 경찰까지 동원되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이대회의 대진은 윤폭흥-이순환의 4회전, 김준호-엄해룡, 송방혜-「스트리」,김석창-최일태, 박병권-「머버한터」, 서재석-이화직, 정복수-「드위드」등의 6회전이었다.
이어 전조선 프로권투연맹이 발족되면서 첫 기염사업으로 11월15일 덕수궁 특설 링에서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전국학련 전재학생후원회 주최에 청년조선총동맹·대한정의단총본부·대한독립청년단·학생공론과 권투연맹 등의 후원으로 제법 거창했다.
대진은 박형권-송방헌의 메인이벤트 10회전을 비롯, 서재석-송주복, 고봉아-조용덕의 8회전, 강창희-김덕용의 6회전, 홍대윤-이치원의 4회전등이었다. 이제나 그제나 정치인들이 권투에 관심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여서 이 대회에도 기라성 같은 인사들이 대회를 빚냈다. 명예고문에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고문에 서상천 유진산 김산 최성장 김윤근 강일우 김동렬 홍찬, 회장에 이철승, 이들이 이대회의 임원으로 추대됐었다.
국내 프로복싱은 이후 통일된 집행부로 체계가 잡혀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연맹은『권투통신』이란 간행물을 펴냈는데 서광왕과 김유창이 주간을 맡아 권투 계 소식을 전했다. 당시『권투통신』이 발표한 선수들의 특기를 소개해보자.
고봉아=왼쪽 어퍼커트와 스트레이트.
김재덕=좌우 훅과 왼쪽 스트레이트.
김창환=왼쪽 잼과 어퍼커트.
박건식=좌우스트레이트와 카운터 볼로.
송방헌=왼쪽 잼과 오른쪽 크로스.
서재석=오른쪽 스트레이트와 어퍼커트 및 연속타.
김진국=왼쪽 잼과 좌우 훅.
차춘섭=좌우스트레이트.
조영진=오른쪽 스트레이트 및 카운터 블로.
최일태=좌우훅.
박공재=좌우스트레이트.
정복수=왼쪽 어펴커트와 좌우 훅.
김계윤=오른쪽 스트레이트와 좌우 훅.
박형권=좌우 훅과 오른쪽 스트레이트 및 카운터 블로.
박련흥=오른쪽 훅과 왼쪽 스트레이트.
조익성=좌우 훅.
신현기=좌우 스트레이트.
이일호=좌우 훅.
양기석=좌우 훅과 스트에리트.
김광선=오른쪽 혹과 왼쪽 잼.
김명복=왼쪽 잼과 오른쪽 스트레이트.
홍삼=잼과 원투 스트레이트.
박광석=잼과 스트레이트.
한수안=오로지 파고들며 좌우 훅과 어퍼커트.
이같이 이『권투통신』은 당시이름을 날린 아마선수들도 소개하고있다.
전조선 프로권투연맹은 48년 9월27일부터 10월6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제1회 전국 프로권투선수권 대회를 개최, 명실상부한 각 체급 챔피언을 가려냈다.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플라이급=이일호 조형기 우동주 김덕성 이순환 원룡희 윤면흥 김진국 이종녹 김광수
▲밴텀급=이경렬 원성태 김해룡 민룡성 왕윤정 송정택 서영철 김석창
▲페더급=박련전 서두선 박진태 김전호 박건식 김영직 양태종 박중복 박면작 서재석 양정모
▲라이트급=김광선 김춘기 최호삼 엄해룡 최진오 김명복 이병상 이화직 김덕용 김일영 김창왕 김강용
▲웰터급=이위달 김윤호 정면수
▲미들급=박공재 양태순 이준우 송방헌 등으로 6개 체급이다.
이 대회에서 이일호 이경렬 양정모 김강용 정상수 송방헌 등이 각 체급 초대 챔피언이 됐다. 이같이 프로권투가 기틀을 다져가며 인기 스포츠로 발판을 굳히고 있을 때 민족적 비극인 6·25사변이 터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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