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갈 때보다 부상으로 쉴 때 더 많이 배웠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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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2일 홍콩 아트센터에서 베토벤 ‘황제’ 지휘·협연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 그는 “15년 전 부상으로 피아노를 못 치던 기간에 작품 해석 및 지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사진 크레디아]

2일 홍콩 아트센터.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67)가 무대에 섰다. 연주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페라이어는 1972년 세계적 대회인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다. 당시 이 콩쿠르에 그가 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출전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돌기도 했다. 또 페라이어가 쇼팽·베토벤을 연주한 음반은 피아니스트들의 ‘참고 문헌’으로 불린다.

 이날 피아노 앞에 앉은 페라이어는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사인을 보냈다. 이날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와 피아노 협연을 동시에 맡았다. 오케스트라는 영국의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ASMF). 창단 55주년 된 오케스트라로, 규모는 작지만 영화 ‘아마데우스’의 연주를 맡았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곳이다.

 페라이어의 피아노 음색은 전성기 시절 그대로 투명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욕심없는 소리였다. 지휘·협연 병행은 규모가 더 작은 바흐·모차르트 협주곡에서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베토벤의 협주곡은 지휘·협연을 피아니스트가 동시에 하는 일은 많지 않다. 피아니스트 페라이어에게 지휘는 어떤 의미일까.

  3일 만난 페라이어는 “지휘는 내게 연주자의 새 길을 열어준 작업”이라고 말했다. 국제 콩쿠르 우승 후 승승장구 하던 그는 90년대 후반에 피아노 연주를 아예 쉬어야 했다. 페라이어는 “악보에 오른쪽 손가락을 베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염증이 커져 뼈에 변형이 생길 정도가 됐다”며 “2년 정도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페라이어는 2000년에 부상을 극복했다. 그는 “끊임없는 물리치료를 했고, 무엇보다 ‘시간’이 부상을 치료해줬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피아노와 함께 지휘를 시작했다. 페라이어는 “피아노를 칠 수 없었던 기간을 사람들은 ‘암흑’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기간에 상상할 수 없이 많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피아노 앞에 앉지 못했지만, 악보를 펴고 연구에 들어갔다고 했다. “피아니스트에게 건반 앞을 떠나 음악을 넓게 조망할 기회는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흔치 않았던 이 기회에 나는 음악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얻었다.” 그는 이때 지휘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었다고 했다. “작곡가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음을 적었을지에 대한 고민, 서로 다른 악기가 합해질 때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페라이어는 10·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황제’, 바흐의 협주곡 7번 등을 연주한다. 피아노 협연과 오케스트라 지휘를 같이 한다. 그간 피아니스트로 한국에서 몇 차례 공연했지만, 지휘자로는 처음이다. 그는 “베토벤이 ‘황제’에서 밤 하늘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마 부상으로 피아노를 떠났던 시절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지휘자로서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줬다.

홍콩=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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