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소송' 커녕 한 건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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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투명성 강화와 소액주주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한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도가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이 제도가 도입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소송도 제기되지 않고 있다. 소송 제기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기 때문이다. 당초 재계는 무차별적인 '줄소송'을 우려했다.

◆ 불발로 끝난 1호 소송=지난 1월 통과된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는 원칙적으로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다. 허위공시.자금횡령.주가조작 등으로 피해를 본 소액주주들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 이기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주주들에게도 판결의 효력이 미친다. 자산 규모 2조원 미만의 상장사도 주가조작이나 내부자거래를 한 경우는 집단소송제가 적용된다.

증권 투자자 소송을 전문으로 해온 법무법인 한누리는 3월 시세조정 혐의를 받고 있는 상장기업 S사를 상대로 국내 첫 집단소송을 추진하다 시간.비용 등을 이유로 포기했다.

한누리의 김주영 변호사는 "S사의 경우 피해자들이 빠른 보상을 원했기 때문에 소송의 대표 당사자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집단소송보다는 개별 민사소송을 내는 것이 위험부담도 적은 편이다"라고 말했다.

◆ 높은 장벽=집단소송은 일단 비용이 많이 든다. 한국에선 원고가 패소할 경우 미국과 달리 소송비용의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 소송 제기 때 청구금액에 따라 최고 5000만원까지 인지대도 내야한다. 소송 기간도 최소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국내에는 집단소송을 대리할 만한 로펌 역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집단소송의 비용과 위험을 감당할 만한 규모인 대형 로펌들은 대부분 피고가 될 기업들이 고객이다. 게다가 한 법무법인이 3년 동안 3건의 집단소송만 대리할 수 있기 때문에 한계가 명확하다.

승소 역시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증거개시제도'가 있어서 집단 소송이 제기되면 회사가 원고 측에 서면자료와 증인 명단을 제출해야 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런 제도가 없다. 회사 자료를 구하기 어려워 입증이 쉽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 금융감독원.검찰이 위법 사실을 적발한 사건이 우선적인 집단소송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도 개개인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까다로운 작업을 거쳐야 한다. 2000년 검찰에 적발된 세종하이테크 주가 조작 사건의 경우 관련자들이 형사사건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주주들이 낸 민사소송은 5년여의 재판 끝에 올 4월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이지은 간사는 "집단소송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미국식의 증거개시제도 도입 등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집단소송제의 활성화를 위해 장기적으로 식품.소비자 등 다른 분야로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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