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생 51년 만에 내 이름 내건 작품 … 다 쏟아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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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박웅의 수상한 수업’의 주인공 박웅(오른쪽)과 극작가 오은희.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나란히 앉았다. 외딴 무인 등대섬으로 꾸며놓은 공간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기 인생 51년. 1963년 동아방송 성우로 연기를 시작한 이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작품은 처음이라고 했다. ‘연극계의 신사’로 꼽히는 배우 박웅(74).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연극 ‘박웅의 수상한 수업’의 주인공으로 열연 중인 그를 만났다. 그를 위한 ‘헌정 연극’ 대본을 쓴 극작가 오은희(49)와 함께였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달고나’ 등을 만들었던 오 작가는 배우 박웅에 대해 “위엄과 귀여움을 함께 갖춘 배우”라며 “평범한 듯하지만 관객을 압도하는 에너지가 있다. ‘박웅’의 여러 모습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극본을 썼다”고 말했다.

 ‘박웅의 수상한 수업’은 2인극이다. 박웅은 판사 출신 노교수 역을 맡아 젊은 연출가 역의 김재만(41)과 함께 극을 끌어간다. “나에게 연기를 가르쳐주면 5000만원을 주겠소”로 시작된 연기 수업. 고립된 무인등대섬에서 두 사람의 악연이 서서히 드러나고,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관객도 숨을 죽인다.

 “연기생활을 쭉 해왔지만 조연을 많이 했어요. 누가 대표작을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죠. 배우라는 게 큰 역이든 작은 역이든 자기 몫을 하면 되니까, 여태껏 하찮은 역이라도 섭외가 오면 다 했어요.”

 무심한 듯 털어놓는 대답 속에 노배우의 연기 철학이 드러났다. 지난 6월 출연한 연극 ‘꽃, 물 그리고 바람의 노래’에선 단 한 장면 등장하는 데도 캐스팅에 응했다.

 대중은 그를 ‘사랑은 노래를 타고’ ‘영웅시대’ ‘여인천하’ 등 TV 드라마 속 장면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연극 배우란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그가 소속된 첫 극단은 김무생·사미자·박정자·전원주 등 동아방송 성우 동기들과 함께 조직한 ‘동우극회’다. 68년 김정옥·이병복 선생의 권유로 ‘극단 자유’에 들어간 뒤론 지금까지 ‘자유’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의 연기는 ‘순간’ 예술이에요.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둬도 보존이 안돼요. 오직 관객의 기억에만 남아있을 수 있죠. 연기를 하는 그 순간 ‘아, 이 장면이 관객의 뇌리에 살아있겠구나’를 관객과의 교감 속에서 느낄 수 있어요. 그게 연극의 매력입니다.”

 ‘박웅의 수상한 수업’에서 그는 관객들과 그런 교감을 한다. 그가 연기하는 노교수가 일생동안 속에 품고 있던 말을 다 쏟아붓는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 박웅도 자신의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속에 평생을 숙성시킨 연기의 맛이 전해진다. 오은희 작가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응축시켜 관객들 귀에 꽂히도록 만드는 내공”이라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안도감·성취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마무리’를 해야할 나이인데,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앞으로도 더 좋은 작품, 더 비중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연극은 다음 달 2일까지 계속된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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