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이성을 배려할 줄 알면 성범죄 안 생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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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긴 생머리, 짧은 치마에 그물 스타킹, 귀걸이.팔찌와 팔뚝엔 패션 문신까지-. 서울대 학생 및 교직원들을 위한 온라인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help.snu.ac.kr/safesnu)'에 등장하는 도우미 캐릭터(그림)의 모습이다.

다소 튀는 차림새로 캠퍼스 식구들에게 건전한 성 문화를 안내하는 이 캐릭터의 실제 주인공은 서울대 성희롱.성폭력 상담소장인 김은경(46)교수(서어서문학과)다. 상담소 조교가 평소 김 교수의 차림새를 본떠 캐릭터를 만든 뒤 온라인 강의는 물론 각종 안내물에도 활용하고 있다.

"성희롱.성폭력 상담소와는 별로 안 어울리는 이미지죠? 그래서 몇 차례나 고사했는데 벌써 두 번째 소장을 맡고 있네요."

2000년 말 문을 연 이 상담소에 김 교수는 1년 뒤 부소장으로 합류했다. 피해자 대부분이 여학생이라 아무래도 여교수를 편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배려에 따라 당시 유일한 여자 부학장(인문대)이었던 김 교수가 발탁된 것이다. 초대 소장은 학생생활연구소장이 겸직했으나 조직이 확대되면서 이듬해 김 교수가 2대 소장으로 취임했고, 2년 임기를 마친 뒤 연임 중이다.

"정운찬 총장께서 처음 소장 직을 제의하셨을 때 '저는 개방적이고 낭만적인 스페인 문학을 연구한 사람이라 안됩니다'고 했어요. 그런데 총장께선 오히려 '그러니까 김 교수가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성희롱 관련 제도가 정착되는 초기 단계인데 너무 빡빡한 잣대를 들이대면 부작용이 심할 것이라면서요."

대학 내 성희롱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2002년 여성부가 전국 20개 대학의 남녀 학생 및 교직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데 따르면 여학생(학부.대학원생 포함)의 39.2%가 성희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대 상담소의 경우 2004년 한해 동안 280건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처리했다.

일각에선 법적 권한도 없는 대학내 상담소가 뭐 그리 큰 역할을 하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초기엔 신고를 당한 가해자가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전원이 패소한 뒤 상담소 역할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학교에선 처벌보다 교육에 중점을 둡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가 사과를 받아들일 경우 전문기관에서 몇달간 가해자 교육을 받는 선에서 중재를 하죠. 잘못이 크고 태도가 나쁠 경우 정학.퇴학 등 징계를 가하기도 합니다."

김 교수는 "물론 중재가 잘 된다 해도 피해자의 상처는 평생 간다"면서 "남녀가 서로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사회 분위기가 정착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외국어대 출신인 김 교수는 멕시코 과달라하라대에서 석사,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1988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글.사진=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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