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가장 길었던 사흘(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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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장도영 참모총장이 다시 방첩대로 돌아온 것은 5월16일 0시가 지나서였다. 출동을 중지하라는 총장의 지시는 집행되지 않은 채였다. 부대의 웅성거림은 계속되고 있었고 수습 특명을 받고 사령부와 예하 사단으로 나간 헌병과 수사요원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해병대 출동이라는 급보가 왔을 때는 조용히 수습하려던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 총장은 출동준비가 진행중이라는 제1보가 전해졌을 때 사태의 책임이 총장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5·16 출동부대를 지휘하는 박정희 소장 등 지휘부는 거의 대부분이 총장과 가까운 장성이고 장교들이었다.
예를 들어 이주일 소장은 장 총장이 군단장이던 때 직속 참모장이었고 군사령관을 맡게 되자 Y사단장이던 이 장군을 군사령부의 참모장으로 끌어온 장 총장이었다.

<장 총장, 성공에 회의>
송찬호 윤태일 준장 역시 장 총장에게 박정희 소장의 거사 계획을 뒷받침 해주도록 간청할 수 있을리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장 총장은 그런 부탁을 받았을 때 단 한번도 군부혁명을 찬성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군 사령관 시절의 약속에 묶여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수사기관의 보고를 번번이 묵살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장면 총리의 조사지시가 거듭 되었다는 사실이다. 장 총장은 미국에서 만난 본사 특파원에게 『장 총리나 현석호 국방장관의 조사 지시가 있었던 지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현석호씨는 『그날 밤 장 총장으로부터 급보를 받고 지프로 심야를 달리면서 맨 먼저 떠오른 것은 <군부 거사설은 저나 박 소장에 대한 모함>이라고 자진해 해명하던 장총장의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시간 그는 잠시 진압과 참가의 갈림길에서 방황했다. 『두 번째 방첩대를 나와 사태가 커진 것을 보았을 때도 장 총장은 혁명이 성공한다고 보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다만 일이 커져 자기와 가까운 고급장교의 희생이 커지고 총장 자신도 불명예스런 퇴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해 의기소침한 듯 보였습니다』(당시의 방첩대 L대령의 회고).『장 총장은 혁명군에 적잖은 공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동부대 지휘관들이 모두 우수한 그의 측근임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처음엔 희생을 최소선에서 수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사태가 확대되었을 때는 체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대의 규모로 보아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을 망설이다 총리와 국방장관에게 사태를 보고하더군요.』(방자명씨(당시 서울지구 CID 대장).
그날 한밤 중 방첩대의 무전기는 부대의 움직임을 숨가쁘게 쏟아 놓고 있었다. 그때서야 장총장의 연락으로 국방 수뇌진이 속속 모여들었다. 장총장과 그 보좌관들 몇 사람만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을 뿐 모두가 정확한 상황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였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무전기를 통해 들리는 한강의 총소리가 긴장과 초조와 불안이 뒤섞인 방첩대의 웅성거림을 순식간에 침묵 속에 가라 앉혔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 육본이 포병단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한순간 모두가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 볼 뿐이었다.
이윽고 장 총장은 진압군 동원에 나섰다. ○사단장 이상국 준장에게 부대를 시청 앞에 진입시키라고 지시했다.

<회의장밖엔 거사군>
×관구 사령부 그리고 △사단을 호출했으나 연결은 계속 차단 당했다. 다시 ○사단에 연락했다 『빨리 출동하라』는 재촉이었다. 이윽고 진압군의 최초의 출동보고를 접수했다. 어느새 시계바늘은 새벽 4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장 총장이 일어섰다. 『우리는 육본으로 갑시다』이때는 현 국방 김업 차관 등이 장 총리 숙소로 떠난 직후였다. 장창국 참모차장, 그리고 한강의 교전 현장에 나왔다가 이곳으로 온 김동하 예비역 해병소장이 총장 승용차에 동승했다. 장 참모차장의 증언. 『그 날밤 은성에서 장 총장과 헤어진 것이 밤12시가 좀 지나서였지요. 집에 돌아가 깊게 잠들었다가 요란한 비상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장총장이더구요. ○사단의 반란이라고만 얘기하면서 서울 방첩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야전복을 꺼내 입고 달려갔지요. 이곳에 도착해서야 상황을 알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우리에게 사태설명을 안 해준 까닭을 모르겠더군요. 곧 바로 장총장은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 <내가 곧 바로 진압시킬 데요>라고 연신 말했지만 나는 대답이 나오지 않습디다. 육본이 포병단에 의해 접수되었으니 별 도리 없이 우리는 인근부대와 연결되어 있는 뒷문으로 들어가 모두 함께 총장실로 직행했어요』
김병삼씨(59·당시 육본 비서실장·준장·내각사무처장·체신부장관·현 경성학원재단이사장)의 증언. 『15일 밤 을지로 입구에 있던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오 10시쯤 비서실 부하가 뛰어와 <○사단에서 이상한 공기가 감돌고 있다>고 하더군요. 깜짝 놀라 바로 육본으로 달려갔어요. 비서실에 도착하여 장 총장을 찾았지요.
관사에는 없고 조금 있으니까 서울지구 방첩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갔죠. 장 총장에게 내가 들은 바를 보고했더니 이미 알고 계시더군요. 그때 방첩대장이 장 총장에게 <박 장군이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상황 보고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습니다. 새벽녘에 방첩대에서 혼자 육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육본도착 후 조금 있으니 <혁명군이 한강다리로 출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 왔어요. 각 참모부장과 처장들을 소집했지요. 확실치는 않지만 새벽 2시30분쯤 모두 도착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일반 회의실에서 회의가 시작됐어요. 회의를 하고 있는데 혁명군들이 육본에 들어왔어요. 건물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 대기하더군요. 자동차 소리가 요란했어요.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척 긴장했어요. <어떻게 희생자를 적게 하고 사태를 해결하느냐>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혁명군과 싸우면 모두 자멸한다>는 얘기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시간까지도 장총장은 육본에 도착하지 않았다.
4시30분 육본에 도착한 장 총장은 혁명군의 서울진입 상황을 다시 확인됐다. 한강을 넘어선 해병대와 공수단이 중심가로 진입하고 있었다.
장 총장은 지시를 기다리는 참모부장 회의를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갔다. 「매그루더」유엔군 사령관실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그 무렵 박정희 소장은 군부혁명 선포라는 결만을 내렸다. 방송은 전군에 흩어져 있는 동지에게 거사결행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젠 제2지휘소 중앙방송국을 떠나 육본으로 갈 차례였다.

<체포되면 허사다>
그러나 망설였다. 그때까지 육본의 상황도, 장 총장의 태도도 알 수 없었다. 『육본으로 가는 게 낫겠지…』 박 소장의 그런 얘기에 누구 한사람 대답을 못했다. 한웅진 장군의 회고담처럼 『섣불리 육본에 갔다가 박 소장이 체포라도 당한다면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는 중대한 기로』였기 때문이다.
육본상황을 일단 확인해야 한다고 서두르고 있을 때 김재춘 대령·한국찬 대령이 달려왔다. 『장 총장이 미 고문단장 「하우스」 소장과 혁명군 진압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한시바삐 육본으로 가 설득해야 합니다.』
가장 염려했던 사태에 마주친 것이다. 『죽든 살든 가서 결판을 냅시다.』 박 소장이 자리를 일어섰다. 두 대의 드리쿼터의 호위 아래 박 소장 일행은 육본으로 질주했다. 방송은 군부혁명의 뉴스를 반복하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발표하는 메시지였다. 부옇게 밝아오는 새벽 거리엔 장도영 참모총장이 혁명을 선포한 삐라가 흩날리고 있었다. 장총장의 뜻과는 관계없이 그는 혁명군의 수뇌였다.
그는 행정수반 장면 총리의 군부 움직임에 대한 염려와 조사지시를 묵살했다. 그 결과 그는 5월16일 새벽 장면 총리의 자리로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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