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 4「라운드」째…한의사·약사 조제권 시비|또 터진 화산…˝한약은 누가 조제해야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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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약 조제권을 둘러싼 한의사·한약업사·약사간의 10여년을 끌어온 업권 다툼이 또다시 한의사와 약사간의 열전으로 재연되고 있다.
분쟁의 불씨는 대한약사회가 마련한 「한약조제 지침서」가 지난 1월15일 보사부 중앙약사심의 위원회를 통과하면서 되살아났다.

<10여년 묵은 싸움>
한약은 과연 누가 지어야 옳은가. 팽팽한 대결상과 양측의 주장을 들어본다.

<팽팽한 대결>
한의사 협회는 「한약조제 지침서」통과 3일 뒤인 l8일 조제 지침서 재심의 요청을 낸데 이어 28일에는 각 일간지에 「약사 한약조제 합법화를 획책하는 조제 지침서 공포시행반대」성명을 게재했다.
대한 약사회가 이에 질세라 2월3일 역시 각 일간 신문에 한의사 협회의 광고보다 2배나 큰 5단통 크기로 「한의사 협회의 억지 주장을 계함」이란 맞 광고를 내고 『약사의 고유권한에 대한 어떤 침해 행동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양측은 성명 전에 이어 농성, 면허반납, 영업중단 결의 등으로 실력행사에 들어선 격앙된 기세였다. 그러나 보사부 등 관계기관의 적극 개입과 종용으로 5일부터 일단 「행동」을 철회하고 보사부의 조정을 주시하는 자세다.
한약 조제권을 둘러싼 이 시비는 63년 약사법 제정과 함께 잉태 된 뿌리 깊은 것으로 76년과 80년, 그리고 지난해에도 각각 한 차례씩 폭발했으나 미결인 난제여서 이번에도 결말 없이 남겨져 휴화산 상태로 내연 할 공산이 크다.
분쟁의 핵심은 한약 조제의 권한이 고유하게 누구의 것이냐에 달려있다.
한의사 측은 당연히 한약은 한의사의 고유 영역이며 양약을 전문으로 하는 약사가 한약을 조제한다는 것은 한·양으로 2원화 되어있는 의료체계에 혼란을 가져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약사 측은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반박한다.

<모호한 법규>
현행 약사법 제21조는 한약·양약을 막론하고 「모든 의약품」의 조제는 약사만이 할 수 있도록 명시됐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모든 의약품 조제가 약사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의약분업이 어려운 만큼 그때까지의 잠정 조치로 부칙에서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등 의료인에게 자신이 직접 진료한 환자에 한해 의약품을 조제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었다는 해석 때문에 한약은 한의사의 고유 영역이 아니라 약사의 고유 영역이며 한의사가 오히려 잠정적인 권한을 영구화 하려하고 있다는 비난이다.
일반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도 한약이라면 당연히 한의사를 연상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 약사법의 규정은 이같이 저마다 유리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모호하게 돼있다.
이 같은 법규정의 모호성이 시비의 원천이긴 하지만 시비가 일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이후 많은 약사들이 약국에서 한약을 취급하면서부터다.
6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약사들은 수가 적었을 뿐 아니라 관례적으로 한약을 거의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차 약사 배출이 늘고 약국간 경쟁이 생기면서 60년대 후반 이후 일부 약국에서 간단한 한방첩약도 취급하기 시작, 70년대 이후 들면서 붐을 일으켜 많은 약국들이 너도나도 한약 취급에 나섰다. 그때까지 한약만을 조제 해 오던 한의사와 한약업사들과 심각한 이해충돌을 빚게됐다.

<1차 공방전>
첫 번째 공방전이 벌어진 것은 지난 76년 말.
국회에서 신민당의원들이 약사라 해도 한약을 조제·판매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당시 발의자인 박영록 의원은 『우리 나라 의료제도가 서양 의료제도에 따른 의사와 약사, 그리고 전통적인 한방의료제도에 따른 한의사와 한약업사의 2원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고 전제, 『최근 2만여명의 개업 약사 가운데 1천 여명이 한약을 조제해 팔고 있어 의약품 공급체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이와 때맞춰 한의사·한약업사 등 한방업계와 약사회는 서로 찬성·반대, 상호비난의 성명전으로 열기를 뿜었다. 여당의 보류방침으로 개정안은 햇빛을 보지 못했으나 한약 조제권 영역싸움은 표면화 돼 날로 치열해져만 갔다.

<2차 공방전>
두 번째 열전이 벌어진 것은 80년4월 보사부가 약사법 개정안을 내면서부터. 개정안은 약국에서는 재래식 한약 장을 두지 말 것과 의약품 조제는 의사·한의사 등의 처방전에 따라서만 해야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조제지침서로 재연>
약국에서의 약조제에 따른 약화를 막고 의약분업을 유도한다는 방침에 따라 마련된 이 개정안을 놓고 한의사·한약업사와 약사회는 다시 치열한 성명전을 벌였다. 약사회는 이에 대해 약사의 고유권한인 조제권 박탈이라며 결사반대, 국한투쟁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처방에 따라 조제해야 한다는 규정은 삭제하는 대신 『대한약전 또는 보건사회부 장관이 지정한 조제 지침서에 의해 조제 해야한다』는 것으로 완화됐다. 또 약국의 한약 장은 없애도록 됐다. 한방업계에서는 이에 대해 양·한방을 분리시키는 계기라고 환영했지만, 약사회 측은 재래식 한약장 사용을 금한 것은 「한약재 보관의 과학화」를 위한 조치라고 해석을 달리해 시비는 다시 연장됐다. 보사부도 「약국의 한약장 철거 문제는 한약 조제권과는 별개 문제」라고 해석, 약사들은 이후에도 약장만 바꿔, 한약취급을 계속 해왔다.

<3차 공방전>
3라운드 공방전은 지난해 가을 한약업사 시험재개 문제를 놓고 한약업사·약사간에 벌어져 상호비난의 성명전 끝에 역시 미결로 끝났다.

<조제 지침서>
이번 4차 전은 대한 약사회가 마련한 조제 지침서가 직접적인 도화선. 이 조제 지침은 80년 개정된 약사법에 따라 보사부 장관이 인정하는 「공정서」로 대한 약사회 자체에서 마련한 것. 이 지침에서 약국의 한약취급을 합법화했다는 것이 한의사회의 주장이다.
한의사회 측은 1월18일 보사부에 낸 재심요청서에서 의약품의 취급 구분에 한약을 의약품으로 간주, 약사의 조제업무 범위에 삽입하는 등 모두 8개항의 부당한 규정을 넣어 한약 조제권을 명문화했다고 지적했다.
한의사회는 약사법의 광의 해석으로 약사에게 한약조제를 허용한다면 역시 의료인이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의약품에 한해 직접조제 할 수 있다는 부칙에 따라 한의사가 양약까지 취급하는 것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약사회는 ▲「양약」의 국가 공정서인 대한약전에도 백삼 등 여러 종의 한약이 포함 돼 있고 ▲약대에서 약용식물·본초학 등 전체 교육시간의 20%를 한약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고 주장, 「약사=양약」의 인식은 잘못 된 것이라고 맞선다.

<늘어나는 한방약국>
대한 약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개국약사 1만6천여명 가운데 4분의 1에 가까운 4천여 곳에서 한약을 취급하고 있다.
이들 약국에서 한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이상. 1백% 한약판매에 의존하는 한약 약국까지 등장하고 있다..
약사회 측은 수천년 동안 과학적인 검증이나 개발 없이 원시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약의 현대화가 약사들의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방약국 계속 늘어>
반면 한의사회는 현재 전국에서 3천5백여 명의 한의사와 3천5백여 명의 한약업사가 전통 의학의 계승·발전에 노력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도 우리 한의학의 높은 수준에 관심을 갖게된 마당에 한약 조제권을 약사회가 공식화하려는 것은 그 동안 쌍아 올린 탑을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의사회의 극한적인 반발은 이 같은 조제 지침서의 약·사 심의회 통과가 지난해 보사부의 양한방 의료체계 일원화. 침구사 부활 방침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결국엔 한의사 제도 자체를 없애려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서 빚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망>
양측의 양보할 수 없는 업권 다툼이 극한 대립의 양상으로 치닫자 보사부는 일단 양쪽 모두에 자중을 촉구, 다툼은 일단 주춤 해졌다.
보사부는 냉각기를 두고 양측의 의견을 다시 들어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10여년래 숙제를 다루는 보사 당국의 행정에도 문제가 없지 않아 양측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은 찾기 어려운 점을 감안할 때 다툼은 언젠가는 또 다시 재연할 것으로 보인다. <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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