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남동생의 결혼예단을 장만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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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언니, 우리는 참 착한 시누이들이다. 그치?』
『그래, 날개만 달면 천사겠다.』
며칠 전 나와 막내 동생은 이렇게 킬킬거리면서 열심히 상자를 만들었다.
방산 시장에서 마닐라 지와 함께 사언 금박지로 씌우고 나니 그런 대로 괜찮아 보였다.
그것은 이제 열흘 남짓하면 장가가는 동생,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올케를 위해 만든 상자였다. 함은 며칠 당겨서 보내기로 했다. 미리 필요한 게 있을 테니까, 그리고 시간여유도 그 편이 나을 테니까.
예비 올케를 불러내 실컷 돌아다니고 남비 우동도 먹었다.
그러면서 요즘 색시로 드물게 참한 규수를 올케로 맞게 된 것도 알았고 상자 속에 넣을 옷 몇 가지도 마련되었다.
동생은 딸 다섯 사이에 낀 막내를 겨우 면한 고명 아들이다.
그런데 열 한살이나 더 먹은 누나 눈이라 선지 어느 구석 못마땅한 데가 없고 마냥 대견스럽기만 하다.
아버지를 여읜 지 서너 달만에 행정고시에 붙었을 때는 못보고 떠나신 것 때문에 기쁜마음 한편으로는 얄궂은 심경이었다.
아버지 가신지는 삼년이 훌쩍 가버렸으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가슴은 새롭게 젖어온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고 자식 때문에 속태우며 홀로된 어머니에게는 아들의 결혼이 어떤 감회를 안겨 드리는 것일까.
기특한 동생 장가간다고 공연히 부산스러운 나룰 보고 이모는 꼭 아들 장가보내는 것 같다며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분수도 없이 잘해주고 싶다.
그러나 형편도 형편이려니와 이제나저제나 가장 떳떳하고 보기 좋은 것은 만사에 분수 껏 살면서 거기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나는 나이를 까맣게 잊고 산다.
고의적으로 생리적인 나이를 깎아 보려는 의도에서보다는 오히려 나이를 셀 짬조차 없이 세월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시집 장가간다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르며 새색시라도 된 기분이다.
대학훈장 살림에 싸갈 것도 없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반드시 형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저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길 원했다.
이제 십오년의 세월이 흐른 뒤 스스로 이룩하는 삶에서 느끼는 보람은 참으로 값진 것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상상을 넘는 커다란 수확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의 결혼 날자가 잡힌 어느 날 시 할아버님(외솔 최현배님)내외 분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그 전의 몇 차례 방문으로 해서 당신들은 물질적으로 거의 지닌 것 없이 검소하게 사신다 것은 알고 있었다. 두 분은 벽장 속에서 양복감·한복감 한 벌씩을 꺼내놓으셨다.『너를 키워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부모님 마음쓰시게 해서야 되겠느냐』하시면서 그걸 가져갔다가 예단으로 도로 가져오라는 말씀이셨다.
『이것은 우리 셋만의 비밀로 하자』는 당부까지 잊지 않으셨다.
약속대로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키시는대로 따랐다.
『공부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하고 여기서 살자』시던 두 분을 다시 뵐 수 있도록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아직도 어린 마음에 스쳐갔던 그 일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푸근하게 가슴에 안겨 온다.
내가 시집 갈 때 국민학교 학생이었던 남동생이 어느새 결혼을 한다.
정신없게 늘어놓은 아빠 방을 보고『으응, 아빠가 나 닮았구나』하던 우리 맏딸은 어느새 중학생이 된다.
날이면 날마다 우리 애들을 맞으시러 아파트 문 열고 기다리시던 시아버님이 세상을 뜨신 것도 어느새 백일이 다가온다.
이제는 세월이 빠르다는 말조차 실감에 처진다. 도무지 가벼워지는 것 같지 않은 짐을 지고도 늘 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싶다.
이렇게 덧없이 흐르는 세월인데 언제 짜증내고 한탄할 틈이 있으랴.
요즈음 결혼시즌을 앞두고 식을 올릴 신랑·신부들이 혹시 백에 하나라도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와 화려함을 탐하지나 않을까.
소박함과 알뜰함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딛고, 내내 그런 마음과 정성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말뿐이 아니고 실천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굳건히 자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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