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산 안내인 김남수 옹<82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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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설 악은 내 일터고 휴식처야. 내외·남-북 설악 할 것 없이 내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걸.
산소 터도 설 악 깊숙이 잡아 놓았지.』
설 악의 산세며 관광명소를 단숨에 주워섬기는 말솜씨가 젊은 등산객을 압도한다.
남 설악 오색약수터에서 선녀여인숙을 경영하며 26년께 등산객을 안내하고 있는 김남수 옹(82·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2구2반)-.
1900년 2월15일생, 크지 않은 체격, 불그스레한 동안에 주름살도 깊지 않아 언 듯 보기에 환갑 전의 초 노다.
『양양서 살며 설 악에 놀러 왔다 산세에 반해 눌러 앉았지. 남 설악 일대의 명소이름은 모두 내가 지은 거야.
약수터 앞 고래처럼 생긴「고래바위」, 그 옆에 붙은「경유담」, 약수터 뒷산의「깃대 암」, 그 앞산의 붓끝처럼 생긴「문필 암」, 절터 뒤의「비봉암」….』
벌써 50여 년간 설악산 길잡이 일을 해 온 노옹이 72개 명소를 소개하는 사이 집 앞으로 흘러 경유 담으로 떨어지는 냇물소리가 장단을 맞춘다.
신식학교는 마당도 못 밟아 봤지만 어릴 때 서당에서「통감』까지 배운 한문 덕에 동네에선「행세하는 집」으로 통한다.
『지난가을까지 여인숙 손님과 어울려 등산안내를 다녔지만 돈을 받고 안내한 적은 없어. 나는 조선옷에 고무신을 신고 가도 등산화에 온갖 신식장비를 갖춘 젊은이들이 숨차 못 따라오니 보기에 딱해….』
젊어서 틀니를 했을 뿐 아직 안경을 써 본 적이 없고 듣기에도 불편함이 없단다. 객지에 내 보낸 두 아들을 모두 50살이 넘어 낳았고 지금도 정력이 계속된다고 자랑하자 옆에 앉은부인 박성녀씨(64)가 민망스러운 듯 눈을 흘긴다. 이것은 스스로 풍 골을 잘 타고 난 데다 설악의 맑은 공기에 약수 덕이라고 소개한다. 등산객이 없는 날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정도가 운동의 전부다.
아직 약이라곤 입에 대본 적이 없고 다만 소 화가 잘 되고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솔가루를 젊어서부터 장복해 오고 있다. 솔가루는 솔잎을 잘게 썰어 그늘에 말린 후 검은콩과 함께 빻아 환으로 만든 것. 식성이 좋아 솔에서 끓여 낸 것은 다 먹고 있지만 닭·개고기는 입에도 안대고 돼지고기도 즐기지는 않는다. 70년대 초까지 집 뒤에 칠성각을 지어 부처님을 모셔 오면서부터 부정타는 음식을 금해 왔단다.
식사 량은 한창 때보다 다소 줄었지만 여전하다. 담배는 1갑 갖고 이틀 피우고 술은 전혀 안 마신다.
여인숙 방 12개로 여름방학 철 1개월간 벌어 부부가 1년을 지낸다. 방1개에 하루 5천 원씩이니 생활비는 계산해 보라며 웃는다. 그 대신 한 여름 외에는 거의 손님이 없다고 했다.
『요즘 젊은 남녀는 너무 풍기가 문란해. 여인숙을 하다보니 못 볼 꼴도 많아 손님을 내쫓기 일쑤지. 텔레비의 가수들도 왜 곱게 서서 노래 안 하고 몸을 뒤틀고 하는지, 무슨 소린지도 못 알아들어.「대명」같은 사극이나 창·판소리는 빼놓지 않고 보고 있지.』
김 옹은 자신이 이름지은 명소들을 등산객들이 불러 줄 때나 관광지도에 나온 것을 볼 때는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다만 산 속에 묻혀 두 아들을 국민학교만 졸업시킨 뒤 객지에 내보낸 것이 한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지가서」를 열심히 보아 산소 터를 명당에 잡아 놓았다며『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껄껄 웃었다. <글=권 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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