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뉴델리 첫대회서 서울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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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시안게임의 캐치 프레이즈는 「염원한 전진」이다.
그러나 낮은 경제수준에다 인류의 약60%가 몰려있는 아시아는 인종·종교·사상·정치·문화등 허다한 이질적 요소로 인해 국가간 이념의 벽이 너무나 높고 두텁다.
따라서 스프츠를 통해 아시아인의 전진과 화합결속을 꾀한다는 발상은 애당초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제로 아시안게임은 소수국가가 참가한 초창기를 제외하는 주최국의 소아병적인 텃세, 소수의 대국 중심주의, 정치에 오염된 다수결의 횡포등으로 얼룩진 파란의 발자취를 남겼다.
이와 관련하여 비대화된 이 대회는 4년마다의 개최자체마저 난산을 거듭, 번번이 유산의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아시아인의 축제가 최초로 탈선, 오점을 기록한것은 58년 제3회 도오꾜대회때였다. 주최국의 잇점을 승부에 작용시킨 선례였다.
복싱 라이트웰터급 준결승에서 한국의 김득봉은 일본선수와 싸워 명백한 우세를 보였으나일본인 주심이 편파적으로 판정, 일본선수의 승리를 선언했다.
한국측은 이에 대해 엄중항의, 복싱장은 큰 혼란에 빠졌고 많은 나라의 복싱관계자들이 한국에 동조했다. 결국 복싱경기위윈회는 일본심판 6명중 5명을 심판단에서 축출, 추최국 일본은 대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정치의 개입으로 심각한 파행상을 처음으로 노출시킨 것은 62년 제4회 자카르타대회.「영원한 전진」이 아닌 「영원한 분란」의 조짐이 뚜렷이 얼굴을 내민 불행한 대회였다.
주최국 인도네시아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스라엘과 대만을 초청하지 않았다. 제3세계의 기수를 자처한「수카르노」는 61년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동맹후진국들을 모은 소위 반둥회의를 주도, 국제정치무대에 새로운 세력권을 형성했으며 아랍·아프리카 및 중공의 입김과 압퍽을 받아 그들의 적대국인 이스라엘과 대만을 따돌린 것이다.
인도네시아당국은 이 타락한 자카르타대회를 인정할수 없다고 주장한 아시안게임의 창시자「손디」씨(인도IOC위원)를 강제추방하는 횡포도 저질렀다.
국제육상및 역도경기연맹은 이 대회의 경기를 볼법으로 낙인찍어 끝내 역도경기는 유산되고 육상의 경우 한국등 다수 국가가 선수를 파견하지 않았다.
작년의 제5회 방콕대회는 태국이 4년전 자카르타대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배려로 정치적 말썽은 없었으나 주최국의 횡포가 춤을 추어 편파적 심판과 관중의 폭력이 속출, 아시안게임의 새로운 일면을 창조했다.
이 대회때 개최된 아시아경기연맹 (AGF) 총회는 한국의 신청에따라 차기 70년 제6회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한국은 68년의 1·21사태에다 재정난이 겹쳐 개최권을 반납, 아시안게임의 오점사에 한페이지를 장식했다.
78년의 제8회대회도 당초 유치국인 파키스탄이 역시 재정난을 이유로 반납, 난항을 거듭하다 간신히 방콕개최로 낙착되었다.
70년 제6회 방콕대회를 거쳐 아시안게임은 74년 테헤란에서 정치적 풍랑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중공의 등장때문이었다.
이란·일본등의 지지를 업은 중공은 대회전부터 아시아 스포츠계를 휘어잡기시작, IOC나 국제경기연맹(lSF)등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AGF로 하여금 「중공가입, 대만추출」의 결의를 강행시켰다.
이 때문에 테헤란대회는 ISF등으로부터「공인불가」의 위협을 받았고 한때 유산의 위기에까지 빠졌으나 거세게 변모하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엔 어쩔수없어 별탈(?)없이 예정대로 성화는 타올랐다.
중공의 등에 업혀 북한도 끼어들었고 「남· 북한대결」이란 미묘한 이슈가 이대회에 추가된 것도 특기할 일이다.
출범전부터 우여곡절로 일관했던 테헤란대회는 중공·아랍권·북한의 대이스라엘 경기거부, 이란의 심판횡포, 북한역도선수의 약물복용으로 인한 금메달3개 박탈등 사건의 연속이었고 중공붐이 휘몰아친 가장 시끄러웠던 정치적 잔치였다.
아시안게임은 당초 인도IOC위원인 고 「손디」씨의 제청으로 48년 한국등 6개국이 발의,태동했으며 51년 인도 뉴델리에서 10개국이 출전 (한국은 전쟁으로 불참)한 가운데 첫대회를 열었다.

<박군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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