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그룹 도약 이끈 '문화예술 CE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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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타계한 박성용(75)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은 그의 세대에선 보기 드문 '르네상스적 인물'이었다. 예일대 경제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에 관계(청와대 경제비서관).학계(서강대 교수)를 거쳤으며, 1984년부터 12년간 그룹을 맡아 금호아시아나를 국내 굴지의 물류.레저 기업으로 일궈낸 경영자였다.

그러던 중 65세 되던 해 돌연 회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한국의 에스테르하지(헝가리의 부자로 하이든.베토벤 등을 후원했던 인물)'라는 칭송을 받으며 문화예술 활동에 심취했다.

창업주인 고(故) 박인천 회장의 맏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56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UC 버클리대 등에서 조교수로 재직했다. 당시 그가 쓴 논문은 3회 이상 게재시 노벨상 수상도 가능하다는 학술지 'International Economic Review'에 두 차례 실리기도 했다.

68년 귀국해 약 2년간 청와대 경제비서관.경제기획원 장관 특보 등 공직 생활을 경험한 그는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72년 부친의 부름을 받고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 84년 선친 타계 후 그룹 총수에 오른 그는 계열사간 합병과 비수익사업 정리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취임 당시 69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을 95년 4조원으로 끌어올리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88년에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했으며, 금호타이어를 세계 10위권의 타이어업체로 성장시켰다.

고인은 절정기였던 96년 회장직을 동생(故 박정구 회장)에게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그룹 경영에 참여한 4형제(5남 박종구씨는 국무조정실 경제조정관) 집안이 수시로 모여 그룹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금호식 형제경영'은 맏형인 고인의 '무욕(無慾) 경영'이 바탕이 됐다. 네 집안은 지금까지도 지주회사격인 금호석유화학의 주식을 9%대로 동등하게 보유하고 있다. 박정구 회장이 65세 되던 해인 2002년 폐암으로 갑자기 타계하자 3남 박삼구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고인은 '1주일에 세 번씩' 금호아트홀 공연을 보러 다니는 열렬한 문화예술인이었다. 한 음악가의 공연을 보고 "연습이 부족하다"는 비평을 했다가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정도로 끔찍이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다.

96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음악계 유망주들에게 비행기편을 무료로 지원하고, 명품 악기를 빌려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금호그룹 사옥에 금호아트홀을 만들어 연주 기회를 제공했고, 지난해에는 아예 서울 한남동 자택에 40석 규모로 자신의 아호를 딴 '문호(雯湖)홀'을 차려 음악인들을 초청했다. 금호미술관을 만들었고, '식물과학계의 노벨상'을 만들겠다며 2000년 '금호국제과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97년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맡아 예술 활동에 경영 마인드를 불어넣었고, 2003년부터 문화예술계를 돕는 기업 모임인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을 맡아 일했다.

젊은 시절 애연가였던 그였지만 91년 국내 기업 최초로 그룹 내 전 사업장에서 완전금연을 실시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금연메달'을 받기도 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문화진흥공로)과 2004 몽블랑 예술후원자상 등을 받았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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