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돈 있는 사람들 놀이터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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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30면

대학 3학년을 코 앞에 두고 있던 이말삼초(二末三初)의 겨울, 내 삶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있었다. 인문학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나는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야학 교사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일주일에 한 번씩 교사들이 모여 인문학 공부를 했다. 고교 시절부터 공부는 작파하고 동서양의 온갖 소설을 독파했던 나는 독서량에 있어서만큼은 내 나이 또래의 누구와 비교해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소설 이외의 책은 별로 읽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에리히 프롬 류의 책이 당시 내가 읽은 유일한 비소설이었다.

이런 나에게 인문학 공부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때 역사·철학·종교·사회·경제·교육·문학 등 여러 분야에 관한 책을 읽으며 공부했는데,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소설만 읽던 나에게 인문학 책은 어렵고 지루했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지적 포만감은 세상 어떤 것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전까지 연애소설인 줄 알고 있었던 스탕달의 『적과 흑』이 사실은 프랑스 왕정복고 시대의 사회상을 그린 것이고, 오마 샤리프 주연의 영화로만 기억하던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소설이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즐거움에 빠져 나는 학창 시절 매를 맞으면서도 하지 않았던 노트 정리까지 해가며 극성스럽게 공부했다. 내 일생을 통틀어 그때처럼 열심히 공부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 읽은 책의 한 구절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지적 원동력이라고. 그때 축적해 놓은 지적 자산이 내 무의식 어딘가에 박혀 내가 글을 쓸 때나 어떤 일에 대한 사고력과 판단력이 필요할 때 암암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젊은 시절 나는 겉멋만 잔뜩 들었지 정신적 성취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그 동안 얼마나 한심하게 살아왔는지, 살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형편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동안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조차 인문학을 홀대하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부터 사회 일각에서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추어 일반인을 위한 인문학 교양도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역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도 많이 생겼다. 인문학 강의를 들은 노숙자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온다.

이렇게 인문학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지만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인문학은 그다지 만만한 분야가 아니다.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처음 인문학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때 공부한 내용을 모두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책은 너무나 어려워서 반쯤은 이해 못한 채로 그냥 의무감에 책장을 넘긴 것도 있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기에 그 깨달음이 더욱 값지고 소중했다.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요즘 인문학 강좌가 많이 생겼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때론 이것이 유한계급의 또 다른 놀이터로 전락해 버린 경우를 보게 된다. 수강료가 수백 만원에 달하는 한 인문학 강좌의 강사가 얼마 전에 나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다. 수강생들이 너무 어렵다고 좀 쉽고 재미있게 강의를 해달라고 주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깐에는 재미있게 한다고 온갖 원맨쇼를 다 한단다. 아무리 쉽고 재미있게 한다고 해도 인문학을 재미있게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인문학 강의가 TV 예능프로는 아니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인문학에 대한 열정을 인문학 공부가 아닌 인문학 책 수집으로 풀고 있다. 지적 허영심에 사놓기만 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도대체 몇 권인가. 지금 그 책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 어려운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나는 인문학이 고프다. 젊은 시절,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 내 지적 욕구를 채워주었던 인문학의 바다에 다시 한 번 빠져 보고 싶다.



진회숙 서울시향 월간지 SPO의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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