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국가인가 해양 국가인가 응답하라, 한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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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21면

지난 회에서 이어령 교수가 유리와 시멘트를 ‘잉크’ 삼아 3D 프린터로 집을 ‘출력’한 중국을 빗대 “잠자는 사자가 이제 눈을 떴다”고 한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기사를 찾아봤더니 시진핑(習近平·사진)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월 27일 중국·프랑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 강연에서 바로 이 말을 했다. “중국은 깊은 잠에 빠진 사자다. 만약 잠에서 깨기만 하면 세계를 떨게 할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해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 그러나 평화롭고 온화한 문명의 사자다”라고 밝혔다.

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3> 중국의 ‘도광양회’를 읽는 하이퍼 텍스트

그런데 이 교수는 이 뻔한 말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는다.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고 한 말은 나폴레옹의 정확한 워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자가 아니라 거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그냥 지도를 가리키며 한 말이라고도 했다. 당시엔 중국을 용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어도 사자로 지칭한 예는 찾아볼 수 없고 라이온이라고 하면 보통 영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ADHD증세로 끝까지 읽은 책이 거의 없었다는 나폴레옹인데도 『손자병법』번역서만은 늘 옆에 두고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황화론처럼 그역시 중국의 잠재력을 평가하면서도 경계심을 품었던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잠자는 사자’가 2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냉전 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외교정책으로 내세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이 밖에 퍼지지 않도록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름)와 연결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잠자는 사자’ 같은 중국 경계론을 피하기 위해 만든 이 말은 구체적으로 ‘不對抗’(맞서지 말라) ‘不樹敵’(적을 만들지 마라) ‘不扛旗’(깃발을 올리지 말라) ‘不當頭’(선두에 서지 말라)의 4불(不)과 초월과 초탈을 권한 양초론을 들 수 있다.

“시 주석의 ‘잠에서 깬 사자론’은 그동안 지켜온 도광양회의 외교 원칙을 부정하는 선언 아니냐며 인터넷에서는 불이 붙었지. 그런데 우리 블로그만 잠잠해서 ‘한국은 잠자는 토끼인가’라고 물었던 거야.”

“그럼 도광양회란 결국 잠에서 깨어난 사자를 경계하지 않도록 하자는 위장전술이었다는 말인가요?”

이 교수는 웃었다. “도광양회는 그 말 뜻 자체가 애매해. 중국인도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려운 말이거든.”

그러더니 별안간 낚시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엔 낚시로 텍스트의 의미를 하나하나 낚았다면 요즘은 그물로 ‘의미의 고기떼’를 잡아 올리는 하이퍼 텍스트의 시대야.”

하이퍼 텍스트로 줄줄이 연결되어 올라오는 검색어를 보니 ‘도광양회’ ‘무소작위’ 같은 말이 꼬리를 문다. 거기엔 고철로 쓰겠다고 들여온 우크라이나의 폐선을 초음속기 탑재가 가능한 항공모함으로 건조한 랴오닝(遼寧)호라는 이름까지 나온다. 이는 근양에서 원양으로 중국의 해군 전략이 바뀐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당연히 랜드(land) 파워와 씨(sea) 파워의 대결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래서 EU 국가가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새로운 대륙세로 등장한 브릭스(BRICS)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거지. 유라시아에 새 지정학론이 대두되는 이유가 이거거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하이퍼 텍스트들은 결국엔 우리 등잔 밑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은 대륙 국가인가 해양 국가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진다. 마이클 그린(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부소장)은 중앙일보 6월 11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진보냐 보수냐 하는 질문에만 익숙한 나는 뺨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얼얼하다.

“등잔 밑은 어두워. 잠자는 사자가 잠자는 토끼로 이어지기도 하는 하이퍼 텍스트의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지.” 이 교수가 덧붙였다. “이 검색어들을 봐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고기 떼의 은빛 비늘이 보이지 않나요?”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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