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청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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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마음의 청결이라하면 마치 명경지수와 같이 밝고 맑고 깨끗한 심정을 표현한 말인데,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 이러한 「마음가짐」을 줄곧 계속할 수가 있을까. 아마 이는 성인이나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대개 우리 범인은 물욕도 있고 명예욕도 있고 식색·기타욕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욕심이라고 해서 모두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진리를 탐구하는 욕심, 자기직책에 충실하여 업적을 쌓으려는 의욕, 기량이 남에게 뛰어나려는 욕심 등은 누가 이를 나쁘다고 하리요.
그러나 물욕과 명예욕. 식색의 욕심과 같은 것은 그 정도가 지나치면 비리와 부정, 기타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가 쉽다. 그러므로 그 한계선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한계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즉「의로운 선」 「정당한 선」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세상에는 직권을 남용하여 불의와 부조리를 저지르고 자기 몸까지 망치는 사람이 있지만, 의가 아니면 천금을 주어도 받지 않고 마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 마음의 청결이라 하겠다.
한가지 고사의 예를 들면 검군의 이야기를 하고싶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건국 44년(627) 가을에 큰 흉년이 들어 이듬해 기근이 심하였다. 사량궁의 궁료들이 관곡을 도둑질하여 나눠먹기를 하였다. 동료중의 검군은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화랑의 무리라 의가 아니면 비록 천금을 주어도 동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궁료들은(검군의 고발로) 죄상이 드러날까 하여 검군을 죽이기로 밀의하고 연회에 초청하였다.(검군의 먹을 음식에는 독약을 섞었다)
검군은 생각하기를 죽음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일은 차마 못할 일이며, 또 그들은 나쁘고 나는 옳은지라 연회의 초청을 피하는 것은 도리어 장부가 아니라 하고, 드디어 연회에 참석하여 음식에 독약을 넣은 것을 알면서도 태연히 먹고 죽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검군전에 실려있거니와, 당시 화랑도의 정신은 이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화랑도의 정신은 후세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진정한 선비야말로 지조를 지키고 청렴결백, 의를 태산과 같이 중히 여겼다.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선비가 우리나라에 한두 사람이 아니었지만, 중봉 조헌과 같은 이는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라 하겠다. 그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박학다식, 성격이 매우 강직하여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여러해 전부터 국방문제·민생문제·기강의 해이, 기타 조정의 부패상 등등을 들어 기탄없이 논박하다가 가끔 귀양도 가곤 하였다. 벼슬도 여러차례 역임하였지만 재조재야 때를 막론하고 시폐를 논하는 날카로운 붓은 매양 왕(선조)을 노하게 하였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자기나라를 통일하고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수교를 트자고 청하자 조헌은 매양 상소를 올려 왜사를 거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수길이 『명을 칠터이니 그 앞잡이가 되라』는 등 오만불손한 사서를 보내오자, 그는 격분하여 도끼를 가지고 궐문앞에 나아가 대죄하면서 외사의 목을 베자고까지 간청하여다. 그러나 왕이 이에 냉담하매, 그는 물러와 시골에 머물고 있었다. 세조 25년(1592), 드디어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올라오고 왕이 서북으로 피난하는 등 국내가 온통 소란하자, 그는 곧 제자들과 의병을 일으키고 장수가 되어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고 응원을 청하였다.
그는 금산성에 둔거한 왜의 한부대가 근읍을 노략질하므로 그것을 격멸하려고 하였다. 관군측에서는 기회를 보아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진격하자고 하였으나 조는 그렇게 천연할 때가 아니라하고 단지 칠백의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였다. 청주의 차 노규도 조를 돕기 위하여 승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가서 합세하였다. 금산성밖 10리쯤에 진을 치고 관군의 응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왜적은 조의 응원군이 없음을 알고 군사를 숨겨 갑자기 우리진의 배후를 습격하였다.
조는 영을 내려 『오늘은 단지 죽음을 각오할 뿐이니 「의」에 부끄럼이 없게하라』고 격려하고 분전 격돌, 여러차례 거듭하다가 나중에는 화살이 다하여 육탄으로 격투하다가 칠백의사가 모두 장렬한 옥쇄를 하였다.
조와 노규도 함께 전사하였다. 금산의 저 칠백의사총이 그것을 기념하고 있거니와, 중봉 조헌은 실로 의에 살고 또 의에 죽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청렴결백한 관리를 「청백리」라 하여 그 수효가 헤일수 없을 만큼 많거니와 이는 오늘날 우리가 거울삼아 본받아야할 것이다.
나는 그 대표적인 예로 조선조 명종(1546∼1567) 때의 청백리 박수량을 들고싶다.
그는 호남사람으로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돌아갔는데, 생전에 부모를 위하여 항상 지방관에 보하기를 청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극히 주도 면밀하고 또 사람됨이 청백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아들이 일찌기 서울에 저택을 마련하려하자 그는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가 본래 시골출신으로 우연히 성은을 입어 이에 이르렀는데 너희들이 어찌하여서 서울에 (화려한) 저택을 마련하려고 하느냐』하고 경계하여 10여칸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그가 돌아갈 때 그의 짐에는 저축한 곡식이 없어 고향으로 운구, 장사지낼 비용까지 없었다. 그래서 대신들이 왕에게 아뢰어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한다(「명종실록」9년정월조), 실록의 사평에는 그가 비록 덕망과 건의는 별로 없었으나 「청백일절」만은 세상에 모범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여하튼 박수량은 청백으로 일생을 꿰뚫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발달된 산업사회에 사는 우리와 옛날 생활양식에서 살던 선민과의 사이에는 금석의 차와 환경의 다름이 있지만, 서로 공통된 이념에는 변함이 있을 수가 없다. 그 이념중의 중요한 하나가 극기자율(자제)의 정신이라 하겠다. 이 정신이야말로 「마음의 청결」을 이룩하는데 기본적 조건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부르짖고있는 「깨끗한 정부」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데는 국민 각자의 「마음의 청결」이 작용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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