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과. 자존심 김세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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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공중 전화 앞.
그 여자가 10원 짜리 물건을 여러 개, 아니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봤다.
『10원 짜리 동전 좀 바꿀 수 있을까요?』 50원짜릴 미안하게 내 보였다.
「나두 써야돼요.』톡 쏘듯 내뱉고는 획 돌아선, 그럴 둣 하게 옷을 입은 그 여자 뒤통수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좀 친절하게 말하면 자존심이라도 도둑 맞는단 말인가? 남에게 웃으며 얘기하면 다 헤퍼 보이고 미친 사람이 된단 말인가.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바티칸시 베드로 사원근처 유료화장실 앞이었다. 새까맣고, 새하얗고, 가무잡잡하고 노르 탱탱하고, 마치 어느 친구 재떨이 콜렉션처럼 인종 콜렉션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어쨌든 여러 색깔의 인간들이었지만 똑같은 일을 보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서너 명을 남겨놓고 나도 준비를 하노라 동전 지갑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한번의 일을 해결할 l백 리라 짜리 동전은 보이질 않았다. 혹시 백 밑바닥에라도 하나쯤 있어주지 앉을까 해서 온통 백을 뒤집다 시피하고 동전을 찾았지만 우리 나라 돈 1원 짜리 하나가 반짝 했을 뿐이었다.
실망하는 빚을 보이자 바로 내 앞의 이탈리아인 모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마디 굵은 손으로 나와 자기네 모녀를 함께 가리키면서 동그라미 긋는 시늉을 하곤 「화밀리. 화밀리, 써?」했다. 그러곤 돈을 받고 있는 풍풍한 여인을 보고 나서 다시 날 보더니 1백 리라 짜리 동전을 들어 보이며 눈을 찡긋한다.
이 바디·랭귀지(Body Language)를 통역해보면『우리와 같은 가족이라 하고 그냥 이 1백 리라로 내자』 이런 뜻이겠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고 오랜 여행 끝이라 가족이란 단어가 찡하게 내 코를 자극했다.
난「그라치에」를 연발하며 명화 만한 이탈리아 지폐를 꺼냈다.
지금 내 앞엔 아까 그 여자가 동전을 세 개 째 넣고 또 하나 동전을 왼손에 대기시키며 전화를 하고있다.
『밥 먹었니?…응! 많이 다쳤어! 미안하단 소리도 안 해? 글쎄 사람들이 그렇다고, 나두 아까 다른 공중전화에서 전활 걸었거든? 근데 돈만 30윈 먹고 나오질 않잖아. 내 앞에 어떤 남자가 걸었었는데 그 사람도 돈을 먹었을 거 란 말야. 그러면「이거 고장 에요」라든지 「돈만 먹습니다」 하면 뭐 입이 부르트니? 참, 우리 나라 사람들 친절하고 담쌓고 살지.』
묘하게도 이 여자는 친절을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릴 뜨며 생각했다.
나도 이 여자처럼 주어야 할 친절은 생각 못하고 받을 친절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이제 좋은 계절, 이 가을엔 우리 모두 화난 얼굴 하지 말고 친절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봤으면.

<방송인>▲45년 서울출생 ▲ 외대 불어 과 졸 ▲ TBC성우1기 ▲ 대한민국 방송상 수상(2,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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