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8)|<제73화> 증권시장(66)-빚더미에 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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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가족들은 반대했으나 나는 11월말 다시 증권계에 나서기로 했다.
11월25일쯤으로 기억되는데 명동영화증권회장실에 출근하여 최상건 부사장에게 관계장부를 가져오게 했다.
내가 25일간 회사를 떠나 있는 사이 6억원의 현금과 증권이 있었으나 4억원 이상의 적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연실색했다.
42건까지 올라갔던 대증주 신주가 25일간에 10전선으로 폭락하는 바람에 엄청난 정산차금을 부담한 것이다.
현물증거금조차 남아있는 것이 없었고 결국 4억원의 적자가 나있었다.
막대한 매수건옥으로 고객들의 위탁증거금마저 없어져 버렸다.
나는 김병완 변호사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다.
강성진 사장 대신 석영학씨가 영화증권사장으로 앉았다.
그러나 영화증권·범일증권·홍익증권은 이미 재기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소생시킬 방안을 모색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연말이 다가오니 내 방은 온통 채권자들의 집합소로 변해갔다.
영화·범일·홍익과 거래를 해온 각계각층의 인사가 포함되어있었다.
이들에게 답변을 하느라 나는 눈코 뜰 새가 없을 정도였다. 나만 먼저 받을 수 없겠냐고 통사정해오는 사람도 적지 앉았다.
3개회사의 사장이나 회장의 얼굴을 보고 거래해온 고객들도 있었으나 태반이나를 믿고 거래해온 투자자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62년이 저물고 63년이 됐다. 새해부터 정치활동이 재개됐다.
구 정치인들도 정치표면에 나섰고 혁명정부의 현역 군인들도 속속 군복을 벗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하루는 민주당의 유옥우씨가 찾아왔다. 급히 돈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강성진사장 때 거래를 해온 사람으로 정치활동의 재개로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망했다.
정치자금으로 그냥도 드릴 입장인데 돈을 못 갚고 있으니 상당히 미안한 생각이었다.
고흥문씨도 급히 5백만원을 갚아달라고 했다.
이렇게 독촉해오는 경♀가 한 두건이 아니었다.
2월초로 기억이 되는데 나는 채권자회의를 열었다.
범일·홍익·영화 등 3개 증권회사대표와 내가 투자하고있는 방계회사대표, 그리고 협동생명보험회사의 박희연 사장 등 채권자들이 참석했다.
영화증권회의실이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있는 방계회사의 주식과 개인부동산을 다 내놓을 것을 약속하고 당분간 참아줄 것을 채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약속대로 영화· 범일·홍익증권회사가 발행한 약속어음에 이서를 했다.
영화는 결국 해가 바뀐 63년 1월19일 문을 닫았다 (허가취소는63년6월12일) .
설립 된지 7개월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5월 파동 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주가는 10월에 약간 회복세를 보였을 뿐 63년에 들어와서도 최저권에서 맴돌았다.
2월25일 전장에는 대 증주 신주는2건대 마저 무너졌다.
증시주변의 투자자들은 아우성이었다.
결국 입회가 중지되고 휴장에 들어갔다. 73일이란 증시 개장이래 최장의 휴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내가 지고있던 빚은 약30억원이었다.
3월초 세칭 4대 의혹사건의 하나인 5월 증권파동의 관련자로 조사를 받게 됐다.
2일로 기억이 되는데 천병규 전 재무부장관·서재식 전 거래소이사장·권병호 전 농협부회장, 또 Y씨· K씨·S씨 등이 입건됐다.
일흥증권 상임고문 이창규씨는 이미 2월27일께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성북경찰서에서 서대문경찰서로 옮겨가면서 조사를 받았다.
범일증권 사장 이태진씨와 최진수씨, 영화증권 사장 석영학씨, 증권거래소 최응환 이사, 장 등도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전 영화증권사장 강성진씨와 홍익증권 사장 승상배씨 등은 구속은 되지 않고 조사만 받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3월2일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군재를 거쳐 7월 초순에 우리는 모두 무죄 석방됐다.
애국적 행위였다는 판결과 함께 우리는 4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계속> 【윤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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