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이 폐품, 김재범에겐 고통도 쾌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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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유도 81kg급 그랜드슬램을 이룬 김재범의 목표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이기는 것이다. 김재범이 26일 태릉선수촌에서 동료와 훈련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양 발목은 퉁퉁 부은 상태였다.손가락은 마디마디 부러진 채 그대로 굳어 S자 모양으로 휘어 있었다. 3년 전 탈구 과정에서 어깨뼈와 함께 부서졌던 왼팔은 오른팔에 비해 눈에 띄게 가늘었다. 세밀하게 다듬어진 조각 같은 몸과 화려한 왕(王)자형 복근에 가려진 상흔(傷痕)은 그렇게 처참했다. 주위 사람들은 ‘상처뿐인 영광’이라며 안쓰러워했지만 정작 그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긴장감, 나날이 성장하는 후배들과의 경쟁이 즐겁다고 했다.

 2년 전 한국 유도 역사상 최연소 그랜드슬램(81kg급)을 달성한 김재범(29)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27일 서울 태릉선수촌 필승관에서 만난 그는 “고통마저도 행복하다. 나 자신을 이길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2년 전 런던 올림픽은 김재범에게 영광과 상처를 함께 남겼다. 아시아선수권·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에 이어 올림픽을 제패하며 4대 국제 이벤트를 모두 석권하는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함께 찾아온 고통도 작지 않았다. 대회 직후 그의 몸은 성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몸 이곳저곳에 칼을 대고 재활에 전념하느라 그는 1년 가까이 유도복을 입지 못했다. 평생 유도만 알고 유도만 생각하며 살아온 그에게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보통 사람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 사이에 결혼도 하고 어여쁜 딸 예담(1)이도 태어났지만, 그 자신은 “유도가 멈추니 내 인생도 멈춘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빵과 우유를 준다”는 유도부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가 시작한 유도는 그대로 김재범의 인생이 됐다. 빠진 어깨와 찢어진 인대, 부러진 손가락에서 밀려오는 통증을 참아내며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는 능력, 김재범은 그것을 ‘정신병’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인천 아시안게임은 1년 간의 공백을 깨고 복귀한 김재범이 여전히 통할 수 있는지 가늠할 무대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재범의 손. 부상으로 구부러지고 휜데다 마디마디 거친 옹이가 생겼다.

 -컨디션 조절은 잘 되나.

 “최근에 운동 강도를 크게 높였다. 지금 몸 상태를 최악으로 끌어내렸다가 첫 경기 사나흘 전에 100%로 만드는 게 목표다.”

 -그랜드슬램 이후 ‘목표가 사라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데.

 “런던 올림픽 직후 내가 은퇴할 걸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제법 많더라. 누군가는 ‘정상에 있을 때 물러나야 아름답다’고 충고도 해줬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지금 1등인데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은퇴하나. 내 목표는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기는 거다. 요즘도 후배들의 장점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 중에 열심히 묻고 배운다. 부끄럽지 않다.”

 -훈련에 열중하는 증상(?)을 스스로 ‘정신병’으로 표현하던데.

 “인터뷰를 하는 지금 이 순간 문득 ‘팔굽혀펴기 10개를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나는 한다. 일종의 강박증이랄까. 상대가 열 시간 훈련하면 나는 열 한 시간 땀을 흘려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를 악물고 했는데, 왜 져야 하나. 이긴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선다. 내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꿔준 고마운 병이라고 해야 할까.”

 -1년 간의 공백기를 어떻게 보냈나.

 “여기저기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느라 운동을 쉬었다. 즐거운 일들도 많았지만 유도가 멈추니 내 인생도 멈춘 것 같았다. ”

 -아시안게임 목표는.

 “이전 대표팀 사령탑이셨던 정훈(45) 감독님은 런던 올림픽 직후 내 몸을 ‘폐품’이라고 하셨다. 사실 지금도 몸이 성치 않다. 하지만 난 이런 상황이 더 재밌다. 더 힘들수록 자신을 이기는 쾌감이 크기 때문이다. 삶에 지친 분들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나의 도전을 보며 새로운 용기를 얻으신다면 더욱 기쁠 것 같다.”

글=송지훈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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