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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힘을 보여준 '얼음물 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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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도은 사는 것과 쓰는 것에 주목하는 라이프스타일 기자입니다. 이노베이션 랩에서 브랜디드 컨텐트를 만듭니다.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

한 초등학생이 문제집 푸는 것을 싫어했다. 어머니는 속이 터졌다. 아이도 어머니가 옆에서 한숨을 푹푹 쉬며 쳐다보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하여 방법을 바꿔 봤다. 문제집을 작은 책으로 만들고 한 장 안에 문제가 적게 들어가도록 했다. 한 장을 다 풀면 답이 맞는지 맞춰 보고 그 페이지를 확 뜯은 후 아이가 그 종이를 마구 구겨서 공 모양으로 만들게 했다. 마지막으로 방 한구석 휴지통에 그 공을 던져 놓도록 했다. 아이는 전보다 훨씬 흥미롭게 문제를 풀 수 있었다.

 하지현 건국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가 쓴 『예능력』에는 이런 사례가 소개된다. 어떤 일을 처음 접하거나 감당하기 힘들 때 ‘즐기자’는 정신으로 프레임을 바꾸면 극복이 쉽다는 의미에서다. 다름 아닌 놀이의 힘이다.

 최근 화제가 되는 ‘얼음물 샤워(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보면서 ‘놀이’라는 키워드가 다시금 떠올랐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누군가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쓰거나 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일명 루게릭병) 협회에 100달러를 기부하는 이벤트. 하지만 동참자 대부분은 두 가지 모두를 행한다. 그리고 물세례를 받은 뒤엔 3명을 지목해 기부를 이어간다.

지금껏 기부가 돈을 쾌척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며 수익금을 마련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행사는 기부가 놀이고 놀이가 기부가 되는, 말하자면 재미를 기반으로 선행을 펼친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여덟 배가 넘는 모금액을 기록했다니 놀이의 효과를 또 한 번 입증한 셈이다.

 요 며칠 빠르게 국내에 상륙한 얼음물 샤워는 ‘현지화’ ‘다각화’로 그 재미를 더해 간다. ALS가 아닌 다양한 사회단체에 기부를 약속하고 또 방식 역시 아이디어가 넘친다. 누군가는 눈 하나 움직이지 않겠다는 공약을 추가하고, 또 누군가는 미리 물세례 아이디어를 공모한다. 20일에는 지인인 사진작가 한 명이 들뜬 목소리로 미션을 알렸다. “원래는 집 앞에서 간단히 할까 했는데 다들 너무 재미있게 하니까 뭐라도 아이디어를 짜야겠어요.” 그는 당일 오후 홍익대 앞 랜드마크로 꼽히는 상상마당 앞에서 한복을 입고 ‘거사’를 치렀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놀이에 대한 의미 있는 대목이 있다. “쓸데없는 짓의 반복은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삶의 중요한 태도를 알려 준다. 쓸데없는 게 분명하지만 재미있는 것에 낭비적으로 몰두해 보는 것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곳간을 채워 주는 힘이 된다.”

 그래서 얼음물 샤워가 보통의 기부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뺏는 이벤트일지는 몰라도 의미는 분명하다. 퍽퍽한 현대사회에서 필연적으로 탄생한 기부 트렌드라는 것. 선행의 의미만 앞세우기보다 아이처럼 놀아보며 일상의 긴장을 늦출 기회를 선사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소유보다 경험이 더 중요한 가치인 시대, 삶의 풍요로움이란 잘 놀 줄 아는 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도은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