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7)|제71화 경기80년<제자=필자>(45)-화동 복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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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l955년 연초부터 시작된 중학교사 신축공사는 그해 8월15일 드디어 완성을 보게됐다. 이에 따라 중학교는 새 교사로의 이사를 서두르게 됐고, 8월20일까지는 이사작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교직원과 학생들은 우선 불편하고 비좁기만 하던 판자집 가교사에서 벗어나 새로 지은 새집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든 옛 화동언덕으로 돌아간다는 감격에 고된 이사작업이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그러나 고등학교만은 파괴된 본 교사를 여전히 미군부대에 징발당한 채, 세종로 한쪽의 천막 가교사에서 화동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중학교 새 교사가 준공되던 다음날인 55년8월16일, 문교당국의 정책변경에 따라 그동안 완전 별개로 분리·운영돼오던 중·고가 약 8개월만에 합쳐지게 돼 경기중과 경기고는 이른바 동일계 중·고로 다시 한학교가 됐다. 이에 따라 경기고 교장이 중학교장을 겸하게 돼 맹건호 중학교장은 타교로 옮겨갔고, 조재호 고교장이 중·고 통합교장으로서 계속 근무하게됐다.
중학교가 화동 새 교사로 옮겨감에 따라 학교당국은 고등학교의 화동 본교사 복귀를 조속히 실현키 의해 다각적인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서울시와 문교부 고위층의 노력이 주효했음인지 교섭은 의의로 급진전, 55년말부터는 교사 인수를 위한 구체적 사무가 실무진에서 진행됐고. 드디어 다음해 1월31일 간단한 인도식을 거쳐 학교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환교식은 그로부터 4일 후인 2월4일 오후1시 화동 본교에서 있었는데 재학생·교직원, 그리고 수많은 학부형과 내빈들이 참석해 역사적 화동복귀를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지켜봤다. 돌이켜보면, 51년 l·4후퇴당시 부득이 학교를 버리고 피난길을 떠났던 그때로부터 실로 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뒤의 일. 그동안 피난지 부산에서의 고난 어린 임시교사 시절, 그리고 환도 후 서울에서 겪은 가교사시절의 슬픈 기억들로 식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는 벅찬 감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교사를 돌려 받았지만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6·25전란으로 심하게 파괴된 부분이 수리되지 않은채로 방치돼 있었던 데다, 수복 후엔 미군이 주둔하면서 시설을 크게 개조, 건물의 상당부분을 군시설에 알맞게 고쳐놓았기 때문이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교장실과 회의실은 「모터풀」로 개조돼 있었고, 본관 옥상은 폭격을 맞아 큰 구멍이 여러개 나있어 빗물을 막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건물 벽에는 총탄이 파놓은 구멍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복구공사는 56년 여름방학 기간 중에 대대적으로 실시됐다. 본관·남관·강당·체육관의 수리비는 서울시가, 그리고 내부설비·수도·난방 등은 학부형과 동창들로 구성된 교사복구 기성회가 각각 부담했다.
조재호 교장이 취임한지 약2개월째 되던 55년1월, 학교당국은 교훈을 새로 정했다. 이때 제정된 교훈이 바로 「자유인·문화인·평화인」으로, 자유인은 용을, 문화인은 지를, 그리고 평화인은 인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해 9월 중·고가 다시 동일계 학교로 편입되면서 중학교의 교훈도 새로 만들었는데, 「씩씩하자·참되자·사랑하자」로 정했다.
또 이 무렵 경기학생들은 각종 학술경시대회·웅변·영어웅변·토론대회·문예활동·연극·미술 등에서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고, 구기·육상·체조 등의 체육활동에서도 과거의 전통을 이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56년11월초에 열린 개교·환교·복구를 한꺼번에 자축하는 기념식·전시회·음악회·웅변대회는 경기학생들의 훌륭한 재질이 한껏 발휘된 좋은 기회가 됐다.
57년4월 조 교장이 물러나고 당시 서울중·고 교장이던 김원규씨가 새 교장으로 취임했다. 조 교장은 김 교장이 있던 서울중·고교장으로 부임, 결과적으로 양교 교장이 서로 맞 바뀌게 됐다.
김 교장은 부임 초부터 교내 건물들의 수리·증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 교장이 미처 끝내지 못한 각종 공사를 마무리짓는 한편 정구장신설, 학교 담장 개축, 수영장 개수, 그리고 뒷동산 잔디 입히기 등 의욕적인 환경정비사업을 폈다.
김 교장은 취임 6개월 만인 57년10월 제21대 이종림 교장의 부임으로 일단 이임했으나 6개
월 후인 58년4월 제22대 교장으로 다시 부임, 60년 4·19직후까지 재임함으로써 경기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2대를 역임한 교장이 됐다. <계속> 【서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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