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화 야구에 살다|경기공고의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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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연패를 구가하던 동산고는 초고교급「에이스」인 신인직이 졸업하면서 몰락한 반면 서울세의 대두로 고교야구 판도에 변화가 왔다. 서울세의 기수는 강속구의 박노학이 이끄는 경기공고였다.
58년 6월5일 청룡기쟁탈 고교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경기공고는 인천고에 2-1로 극적으로 승리, 해방후 12년만에 서울「팀」이 고교야구정상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특히 이 우승으로 더욱 감개가 무량한 사람은 경기공고의 이인관교장이었다.
이교장은 56년 인천고에서 경기공고로 옮겨 부임할때 인천고 교사들이 모인 사석에서 『3년안에 인천고를 깨뜨릴 「팀」을 구성하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호언한뒤 꼭 3년만에 정상을 정복한 「집념의 교장」이었다. 이교장은 국가대표감독을 역임한 오윤환을 감독으로 초빙하는 한편 대전중출신의 박노학(현 광주상 박노국 「코치」의 형), 한발중의 김영빈· 김왕경등을 「스카우트」했다.
이교장의 야구열의는 대단해 당시엔 만들기 어려운 야구부 합숙소룰 마련했는가하면 결승전 아침엔 주전선수인 박노학·김영빈 두사람을 학교안 사택으로 불러 아들 이홍식(당시 경기고 3년·현충암학원이사장)과 함께 넷이서 식사를 함께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제13회 청룡기대회는 이 해엔 야구장이 확장공사중이어서·육상경기장에서 벌어졌다고 경기공고-인천고의 결승에는 2만관중이 몰려들었는데 경기고(3회)·선린상고(8·9회)·중앙고(10회)등이 번번이 결승에서 좌절한 이래 첫 패권을 노리는 서울「팀」인 경기공고률 열렬히 응원했다. 경기공은 투수 박노학·포수 김옥경·1루수 간석규·2루수 육덕룡·3루수 정거태·유격수 최향렬·좌익수 정태길·중견수 김영빈·우익수 김태폭등이었다.
인천고의 투수는 후에「크라운」·한일은에서 활약한 역시 강속구룰 주무기로하는 이선덕이었다. 열기를 뿜은 경기는 2회말 사구로 출루한 5번 박노학이 2루 「스틸」을 시도하다 오른쪽 발목을 심하게 다치면서 인천고쪽으로 기우는듯했다.
박노학은 2회초 1사만루의 위기에서 인천고의 두타자를 삼진으로 요리, 기세를 올려·투지가 넘친끝에 부상을 한것이다. 오윤환감득은 교육지책으로 가끔 투수연습을 한 1루수 천석규를 투수로 기용했는데, 견과론이긴 하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간투수는 이때엔 희귀한「사이드·드로」로 인천고 타자들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선취점은 인천고가 먼저 뽑아냈다. 5회초 1사후 인천고 2루 주자가 과감한 3루 「스틸」을 감행하자 당황한 1루수 박노학이 박송구, 불로소득의 1점을 올렸다. 인천고 김선웅감독의 득의의 기습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경기공고는 7회말 고교야구사에 남는 「드리·번트」로 결승점을 올리는등 일거에 2득점, 대세를 판가름지었다.
1사후 2번 최향렬의 안타와 3번 김왕경이 사구를 골라 1, 2루에 주자를 두고 4번 김형빈이 3루수를 살짝 넘는「텍사스·히트」를 날려 1점을 만회했다. 이어 계속된 주자 1, 3루때 5번 박노학이「스쿼즈·번트」를 시도하자 인천고 3루수가 주자를 견제하느라고 우물쭈물하다 야선이 되어 만루의 황금 「찬스」를 맞았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6번 천작규는 감독의 「사인」에 따라 「번트」를 시도했으나 계속 「파울」로 「볼·카운트」는 2-1이 됐다.
그러자 인천고내야진은 정상위치로 돌아갔는데 이때 오감독은 의표를 찌르는「드리·번트」룰 지시, 결승점을 올렸다.
경기공고는 극적인 우승을 차지하자 『우승경기에』 『전국고교선수권제패』라는 「플래카드」를 두대의「트럭」에 걸고 종로룰 거쳐 아현동학교까지 「카·퍼레이드」룰 벌였다.
경기공고는 청룡기대회 제패에 이어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도 결승에서 경남고를 5-0으로완파, 명실상부한 고교 정상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렇게 경기공고가 고교야구에서 선풍을 일으키자 같은 계열인 경서중의 입학경쟁률이 높아져 59년엔 전해의 2-1에서 6-1까지 껑충뛴것은 지금도「에피소드」로 남아있다.
박노학은 청롱기대회에선 발목 부상으로 고전했으나 이해 고교생이면서도 10윌말 도시대합전에 출전했다.
민준기·정두영·남갑균·김옥경·김영빈등과 함께 대전대표로 출전한 박노학은 선발 투수로나서 박뢰시·서동준·신인항등 기라성같은 선수들이 줄비한 인천「팀」을 2-0으로 완봉,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박노학은 이때의 강속구를 인정받아 고교생으로 대표단에 선발, 이듬해 제3회 동경「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지만 경기에는 한번도 등판치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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