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의사, 탈북 약사와 손잡았지요 … 탈북자 정착 돕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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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약사 출신으로 탈북자를 위한 트라우마 치유센터 ‘새삶’을 세운 이혜경 대표(왼쪽)와 후원자인 재미교포 소아과 의사 최윤희씨가 만났다. 최씨는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고(故) 최창윤 전 총무처 장관의 딸이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을 지낸 찰스 카트먼의 부인이다. [최승식 기자]

‘소아과 의사가 되면 북한에 가서 불쌍한 북한 어린이를 치료해 줄 거야.’

 미국 뉴저지주 포트리의 소아과 의사인 재미교포 최윤희(46)씨의 어릴 적 소원이다. 아버지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 총무처 장관을 지낸 고(故) 최창윤 박사이고, 함경도 함흥 태생인 어머니 주인숙(70)씨는 지금도 서울 방배동에서 소아과를 운영하고 있다. 외할머니인 김경신(94)씨까지 소아과 의사였으니 최씨는 입버릇처럼 저 소원을 외우고 다녔다.

 최씨는 바람대로 고려대 의대 졸업 후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소아과 전문의가 됐다. 하지만 북한에 가서 의료봉사 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남편이 아는 북한인권단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를 지내고 2001~200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을 지낸 찰스 카트먼이 그의 남편이다. 돈을 낼 거면 차라리 한국 단체가 더 좋겠다는 아쉬움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4월 말 서울에 탈북자 트라우마 치유센터 ‘새삶’이 설립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후원금을 보냈다. 최근 새삶 운영진·회원들을 만나기 위해 일주일 일정으로 귀국한 최씨를 새삶 이혜경(49) 대표와 함께 만났다.

 “기사를 통해 탈북자 자살률이 일반 국민보다 세 배 더 높다는 사실을 보고 너무 가슴 아팠어요. 좀 더 나중에 후원할까 하다가 나이 들면 더 기운도 없고 그 사이에 한 명 더 이 세상을 떠날 것 같더라고요. 그럼 일찍 시작하자, 했지요.”(최윤희)

 최씨는 새삶에 대한 관심이 일회성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6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그가 멀리 미국에서 보내준 관심은 새삶 운영진과 회원에게도 큰 힘이 됐다.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고맙다고 했어요. 지금 저희한테 필요한 건 정신적 자존감이거든요. 멀리서도 우리한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게 감사했죠.”(이혜경)

 두 사람은 지난 3개월간 200여 통의 e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래도 비슷하고, 의사 어머니를 둔 점도 닮았다. 이 대표 역시 내과 의사 출신인 어머니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북한에서 약사로 12년간 생활하다 지난 2002년 노모, 두 딸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새삶은 이 대표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다른 탈북자는 덜 겪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든 것이다. “처음에 왔을 땐 약사 경력이 아예 인정이 안 됐어요. 그래도 뭔가 하고는 싶은데 가족들은 먹여 살려야 하고. 그래서 2년간 청소일을 다녔는데 굶어 죽지는 않겠더라고요.” 이후 신문배달·전단지 부착 등 각종 일을 해가며 삼육대 약대 학사 과정을 졸업했다. 내친김에 북한의료정책을 주제로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까지 땄다.

“한국은 최고의 경쟁사회고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북한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여기 와서 처음 해요. 잘 정착하려면 정신력을 키워야 해요. 같은 탈북자 출신인 제가 노하우를 전해주고 싶어요.” 새삶은 탈북자 심리치료와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최씨는 지난 2일 방문한 새삶 회원들의 합창 연습얘기를 꺼내며 “그분들 눈을 보니 ‘우리도 할 일이 있고 잘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자부심 같은 게 비치더라”며 이 대표를 격려했다. 8일 미국으로 돌아가는 그는 “나중에 꼭 북한에 직접 가서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글=위문희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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