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도전 본지창간 15주년기념 특별기획 국내외석학100인의「그룹인터뷰」(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 역사가 시작된 지 5천년. 그 동안 우리는 숱한 국난과 민족의 위난을 겪어왔다. 대륙세력의 잇따른 위협과 침입, 왜구의 약탈과 침략, 오늘은 국토의 분단과 함께 남북사이의 긴장과 대치의 현실마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인 환경 또한 밝지 못하다.
우리 역사 속의 불안과 혼돈은 외부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국민족의 반도적 성격」을 탓하는 숙명론도 있고 때로는 민족성의 반성을 촉구하는 자조적인 각성론도 있다. 사대주의나 당파성을 거론하는 개탄의 소리도 없지 않다.

<만주대륙까지 기상 떨쳐>
그러나 한가지 엄연한 사실은 그 어떤 난국이나 곤란도 결국은 극복하고, 줄기차게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행이나 우연의결과는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민족은 어딘가 불멸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은 그 민족의 우열을 가늠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이 어디서 기원했으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느 민족이든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은 있게 마련이다. 고대문화의 창조에 참여한 민족일수록 그런 우월감은 더 강하다.「그리스」민족, 「로마」민족이 그렇고, 중국민족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근세에 이르러「나치스」독일의「게르만」민족, 일본의「천손민족」설이 그런「도그머」의 주인공들이다. 「로마」인들로부터「야만」인의 소리를 들었던「게르만」족, 우리와 중국인들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일본인, 이들이 스스로 우수한 민족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역사적 환경·전통, 그리고 교육을 돌아보아도 강인한 민족의식, 억센 저항정신, 그리고 위대한 창조력의 면모를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한국사의 기반이 흔히 우도에 국한된 듯이 생각되지만 그것은 역사의 제한된 한 국면만을 조명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원로 국사학자 이완근 박사는 우리역사가 펼쳐진 무대를 이렇게 조감한다. 『동일민족국가로 그 체제의 완성을 본 고구려·발해의 역사가 거의 10세기에 걸치는 장구한 연륜동안 광활한 만주대륙에까지 그 기상을 떨쳤었다. 고려·조선에 이르러 우리역사의 무대는 반도에 극한 되었지만 그 시기도 10세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한국사의 무대, 한국민족의 역사적 특성은 반도적인 민족성 그것과는 판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이 스스로를 일컬어「한」겨레라고 하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바로 이「한」은 원래「밝다」 「많다」「크다」「높다」 「바르다」등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한민족」은『바르고 밝고 큰 민족』이라는 뜻과 통하는 것이다.

<가장 강인한 민족성 지녀>
아득한 상고사를 벗어나 역사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우리 민족은 여러 분야에서 문화적인 독창성을 발휘했었다.
이기백 교수는 원효의 사상, 장엄·미려한 불교미술, 고려의 청자나 금속활자, 세종의 한글창제 등 두드러진 예들을 지적했다.
우리는 때때로 역사의 굴절과 전환 속에서 숙명론에 빠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우리의 역사는 으례 침울하다』거나『민족성자체가 그렇다』거나『희망이 없는 민족』이라는 등의 탄식과 자조는 무책임한 좌절감의 표시일 뿐이다.
『민족성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민족성을 형성하는 것』이라는 이기백 교수의 말은 새삼 각성의 경구처럼 들린다.
일본의 동양사학자「에가미·나미오」(강상파부 교수)는 최근 한국민족을 평가하는 인상적인 말을 들려 주고있다.
『한국민족은 강인 한데가 있다. 당나라·원·일본 등 주변의 열현 들이 끈질기게 침략을 시도했었지만 결국은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한국민족은 어떤 역경도 버티면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있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친야를 중원이나 대양으로 돌려 상대적인 기준으로 한국민족을 조명해보면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가령 한반도에 다른 민족, 이를테면 일본민족이 살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빚어졌을까. 「에가미」 교수는 자신이 던진 우문(?)에 명쾌하게 자답한다. 『벌써 망했을 것이다』는 얘기다. 「베트남」 민족은 오랜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그 강인성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본의 동양사학자는『「베트남」주변의 나라들이 약할 때만 이들은 독립할 수 있었다』고 풍자한다. 「베트남」엔 전쟁이 끝난 지금에도 평화가 깃들이지 못한 현실을 그는 주목했다.
「러시아」민족도「에가미」교수는 별로 높이평가하지 않았다. 그 넓은 국토, 그 많은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괄목할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저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민족성, 그 하나만 놓고 보면 중원의 민족으로 한국민족만큼 강한 민족이 없다는 것이 이사학자의 견해다.
우리 민족의 강점 중엔 『망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스스로 갖고 있는 것도 지적되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있는 민족은 쉽게 망할 수 없다고 이 노 교수는 말했다.
조선왕조 5백년동안의 지리멸렬했던 당쟁사를 두고 우리민족의 품성과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연산군 때부터 왕조말기에 이르는 약3백60년 동안 쉴 사이 없이 거듭된 당쟁은 심한 경우엔 28개 분파를 낳은 적도 있었다.
어떤 때는 상복문제 하나를 놓고 정권을 다투기도 했었다.
정치부패는 물론 국력의 소모는 여간 아니었다.
당쟁의 배경은 결국 감투싸움이었다. 양반의수는 늘고 더구나 세습제마저 곁들여 날로 누적되는 현실인데,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속에서 관리등용은 한정되어 있었다. 양반들 사이의 싸움은 거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당쟁도 긍정적 요소 많아>
그러나 당쟁 그 자체를 민족적 열등의식이나 비도덕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는 입장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사학자들 중엔 조선왕조가 5세기에 걸쳐 정권을 유지했던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워싱턴」대(시애틀)의「팔레」 교수는 조선왕조의 당쟁을 두고 『서로 상대세력을 감시할 수 있는 자동제어장치의 구실을 기대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정치부패도 어느 한계를 넘을 수 없었으며 정치 악을 조장할 여지도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정치이념과 정책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한편 당쟁의 양상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국내적인 대립·항쟁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를 단순히 악순환의 과정으로 평가하려는 자세는 결국 정체의 굴레에 사로잡히고 마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다.
그보다는 비록 악순환의 역사일지라도 그 속에서 발전적이고 진취적인 요소를 찾아 순화시켜가는 자세야말로 새시대를 맞는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계속>

<그룹·인터뷰>이완근<국사·정신문화연구소장>|이기백<국사·서강대교수>|「에가미」<강상파부·동양사·일본>
「시리즈」차례 <프롤로그> 한반도 ·한민족|<제1부>국제정세와 한국이 안보|<제2부>한국의 사회개혁|<제3부>한국의 경제|<에필로그>후대에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대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