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지휘부 ‘악마 구타’ 석 달 감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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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노철래 의원=“윤 일병 사건에 대해 언제 보고받았나.”

 ▶한민구 국방장관=“인지한 건 7월 31일이다.”

 ▶새누리당 이병석 의원=“장관에게 직접 보고된 건 언제냐.”

 ▶한 장관=“보고를 받아 알게 된 게 아니고 7월 30일 언론보도를 보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4일 오전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현안질의에 출석한 한 장관은 윤모(20) 일병 사망사건을 “언제 보고받았느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한 장관은 청와대 안보실장에 임명된 김관진 전 국방장관의 후임으로 6월 30일 취임했다. 윤 일병 사건에 대해 주무장관이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 취임 후 한 달 동안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윤 일병은 4월 7일 선임병들의 집단구타로 사망했다. 군 검찰이 헌병 조사를 토대로 구타 가담자 6명을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한 건 5월 2일이다. 그런 만큼 적어도 5월 2일에는 군 검찰의 기소장을 통해 육군 지휘부 대부분이 “군대판 악마 같은 사건”(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기소장에는 “(윤 일병에게) 치약을 먹이거나 매일 야간 지속적인 폭행·가혹행위와 유모 하사의 폭행 방조행위 등을 추가로 확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육군 지휘부는 최소한 석 달 이상 사건을 은폐했다.

 익명을 요구한 군 소식통은 사건 당시 국방장관인 김관진 실장도 “사고 다음 날인 4월 8일 ‘육군 일병이 선임병 폭행에 의한 기도폐쇄로 사망했다. 손과 발로 가슴 및 손 부위를 수십 차례 폭행당했고 기도 폐쇄로 인한 뇌손상이 원인’이라는 간단한 보고만 받았다”고 국방부 당국자가 설명했다.

 육군이 윤 일병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다. 5월 22일 1차 공판을 시작으로 재판이 세 차례나 진행됐지만 피해자 유족들에게 진상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유족은 관련 내용을 알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군 인권센터의 폭로로 가혹행위의 실상이 공개된 뒤인 1일에야 육군 검찰단장 등 사건 관계자들은 국방부 기자실을 찾아 ‘늑장’ 브리핑을 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유가족과 군 인권센터의 공개가 없었으면 조용히 지나가려 했던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육군 고위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군 검찰의 조사 직후 언론에 조사내용을 발표하려 했으나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고, 22사단 총기 난사사건(6월 21일) 등 굵직한 악재가 연이어 터지며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명했다. 세월호 때문에 윤 일병 사건을 덮었다는 의미다.

 육군은 22사단 총기 난사사건 당시에도 언론에 내용이 공개된 뒤에야 기자실을 찾는 뒷북치기를 되풀이했다. 그래서 국방부 주변에선 “군의 조직적인 폐쇄성이 낳은 참극”이라는 말들이 나온다. 익명을 원한 예비역 장군은 “이쯤 되면 조직적이고 추악한 은폐라고밖에 볼 수 없다”며 “어쩌다 군이 이 지경이 됐는지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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