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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8월의 주제 - 여름, 소설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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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하는 ‘이달의 책’ 8월 주제는 ‘여름, 소설 속으로’ 입니다. 밀란 쿤데라·파울로 코엘료·이창래 등 자기만의 세계를 꾸려가고 있는 소설가 셋의 신작을 골랐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숙한 성찰로 무더위를 씻어보시기 바랍니다.

14년 만에 찾아온 쿤데라 … 세상은 한 편의 농담이니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민음사
152쪽, 1만3000원

작가의 이름 만으로도 일독(一讀)의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한때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표현할 때 마치 ‘일반 형용구’처럼 쓰이곤 했던 제목의 장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85)이니 말이다. 더구나 그가 2000년에 발표한 『향수』 이후 14년 만에 내놓은 장편. 80대 중반이 된 작가의 이른바 ‘노년의 문학’이다. 소설 『참을 수 없는…』이나 이를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에 매료됐던 독자들에게는 옛사랑을 만나는 흥분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것 같다.

 책은 우선 가볍다. 150쪽 남짓이다. 또 커다란 퍼즐을 구성하는 작은 조각들 같은 수많은 에피소드와 장면들로, 잘게 나뉘어 있다. 그래선지 빨리 읽힌다. 일반적인 소설 스타일과 다른 쿤데라 특유의 화법(話法)은 반대로 읽는 속도에 제동을 건다. 유럽 현대사나 역사철학, 세상살이에 대한 밀도 높은 성찰 없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툭툭 튀어 나온다.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삶의 하찮음과 무의미함에 주목한다. 난해한 퍼즐 같은 문장으로 보잘것없고 의미 없는 것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 민음사]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 흐루쇼프 등이 화장실에서 벌인 한바탕 촌극(실재 있었던 사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을 회상하며 샤를과 칼리방 등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런 사례다. 과장 섞인 스탈린의 자고새 사냥 무용담을 면전에서는 군말 없이 들었던 추종자들이 화장실에 따로 모여서는 스탈린을 거짓말쟁이라고 성토했다는 게 촌극의 내용이다. 칼리방과 샤를은 스탈린의 사냥 무용담이 농담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고, 그런 순진과 무지의 결과로 ‘새로운 역사’의 ‘위대한 시기’가 열렸다고 촌평한다. 공동생산한 상품(commodity)을 똑같이 나눠 모두가 잘 살자는 사회주의식 혁명도 실은 주도 세력의 입장에서는 성공해도 실패해도 그만인 농담 같은 기획이었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역사’‘위대한 시기’는 소련의 실패한 사회주의 실험을 비꼬는 표현으로 읽힌다.

 소설의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해 보다 의미심장한 대목은 여성의 배꼽에 대한 성(性)적이고 문화사적인 상상력이다. 또다른 등장인물인 알랭은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배꼽을 훤히 드러낸 아가씨들을 목격하고는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집중돼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린다.

 여성의 배꼽은 어떤 존재인가. 성적으로 매력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무한 반복되는 생식작용에 관련돼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의 성장과 확산에 필수적이다.

 문제는 존재의 본질은 하찮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쿤데라의 세계 인식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간들의 모여 이뤄가는 삶이란 무의미한 축제일 뿐이다. 소설의 핵심 메시지는 그렇게 읽힌다.

 불분명하고 유동적인 소설의 의미를 독자가 곱씹으며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와 소설의 중간쯤, 알쏭달쏭한 부조리극과 같은 느낌이다.

신준봉 기자

'신비작가' 코엘료의 파격 … 불륜에 눈을 돌리다

불륜
파울로 코엘료 지음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360쪽, 1만3800원

파울로 코엘료는 평론가의 골칫거리다. 아무리 혹평을 해대도 책은 순풍에 돛 단 듯 팔린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부수가 1억6500만 권, 생존 작가 중 손가락에 꼽힌다. 평론가들의 독설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영국 출판평론가 스튜어트 켈리는 가디언지에 “병적 자부심과 미심쩍은 신비주의로 버무려진 역겨운 수프 같은데다 어제 내다버린 상한 카망베르 치즈보다 못한 작품”이라고도 비판했다.

 소설에선 몽환적 세계를 그리지만 코엘료도 알고 보면 만만찮은 사람이다. 반독재 투쟁을 하다 고문을 받은 전력이 있다. 히피 문화에 심취해 록밴드를 결성하기도 한 반항기 가득한 인물이다. 그는 브라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트위터에 쓸 거리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작정한 듯 『불륜』을 내놨다. 전작에 비해 파격적 소재다. 꿈과 욕망 그리고 내면의 탐구라는 화두는 여전히 붙든다. 남 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린 30대 여기자 린다가 안정된 삶에 회의를 느끼고 유부남과의 연애에 빠져드는 얘기다.

 린다는 부유하고 성실한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여성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살며 명망 있는 신문사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기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득 삶의 회의가 찾아온다. 한 가난한 작가와 인터뷰를 하면서다. “행복하기보다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얘기가 린다를 사로잡는다. 평온한 삶에 실금이 간다. 평생이 지금과 똑같을지도 모를 거라는 사실이 그를 숨막히게 한다.

 그러다 고교 시절 남자친구였던 정치인 야코프를 만나 충동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처음엔 충동이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번진다. 린다는 그와의 만남을 이어간다. 만남은 뜨겁지만 린다는 환상과 실제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는다.

 린다는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만인에게 손가락질 받는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터와 달리 린다를 괴롭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죄책감과 자기합리화, 그리고 파괴 충동이 그를 좀먹는다.

 『불륜』의 외형적 골격은 린다의 외도에 대한 서사다. 하지만 이야기를 이끄는 힘은 린다의 폭풍우 같은 내면 묘사다. 불륜 행각 자체보다 린다의 광기 어린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잔잔한 바다에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다시금 평온을 되찾는 일련의 순환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이정봉 기자

계급 나눠진 미래 사회, 그 벽을 넘은 소녀

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525쪽, 1만4800원

만조(滿潮)가 되면 육지로 바닷물이 들어찬다. 하루에 두 번 혹은 한 번. 어김없이 물이 차고 빠지고 세상은 변한다. 자연의 섭리인데, 인간사와도 맞닿아 있다. 삶이 늘 똑같다고 생각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있듯 변화의 순간이 있다. 이는 책의 근간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한 대사 ‘On Such a Full Sea’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만조의 바다를 맞았는데 밀물을 타면 행운을, 놓치면 불행을 맞이할 것이라는 외침이 책 머리에 써있다.

 이야기는 가상의 세 지역을 무대로 펼쳐진다. 배경은 미래 미국의 철저한 계급사회다. 돈이 많고 기반시설과 사회 시스템이 갖춰진 수준에 따라 차터, B-모어, 자치주로 나뉜다. 현재에 빗대자면 부자, 일하는 중산층, 가난한 사람들의 지역이다. 세 지역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결코 넘을 수 없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키 150㎝의 10대 소녀 판이 금기를 깨버린다. 그가 정문을 나서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의 화자는 ‘우리’다. 판이 살았던 B-모어의 사람들이 집단 서술하는 시점이 독특하다. B-모어 사람들은 잠수사였던 판처럼 모두 직업이 있지만 그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이라는 것은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체득된 행위이고, 우리의 미래는 거의 대부분 설정되어 있다.”(134쪽)

 판은 사라진 남자친구를 찾아 홀연히 떠난다. 판이 여행한 세 지역은 완전히 다르지만, 만난 사람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모두 희망과 욕구와 슬픔과 상처받은 꿈들을 가지고 산다. 가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고, 결국 틀에 매달리고 마는 사람들이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로 프린스턴대 교수(문예창작과)인 저자는 “(책이) 우리 시대의 우화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등장인물에 우리를 투영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만조를 맞은 순간마다 조류를 타고 나간 여주인공 판의 처세술도 슬쩍 궁금해진다. 이 구절로 갈음해도 될 것 같다. “그녀의 대담성은 그녀를 그저 앞으로 밀고 나간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힘으로 발견한 그 자리에 굳건하게 고정시켰다. (중략) 그녀는 나머지 우리들처럼 운과 적의에 영향을 받았다.”(519쪽)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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