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기 싫은 내용" 신상 제보 … 청와대 분위기 급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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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4차 회의에 출석해 한 직원이 건넨 쪽지를 보고 있다. [뉴스1]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16일 전격 사퇴했다. 정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위증 논란에 휩싸였고 정회 중 ‘폭탄주 식사’ 의혹이 제기돼 야당은 임명 철회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임명 강행 의지를 분명히 했다. 지난 15일 오후 2시30분 정 후보자에 대한 청문보고서를 다시 보내줄 것을 국회에 공식 요청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정 후보자를 임명하겠다는 의지”라며 “지명 철회할 사람에 대해 보고서 재요청을 왜 하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의 임명 강행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정 후보자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16일 오전 10시쯤 보도자료를 내고 자진 사퇴했다. 박 대통령의 임명 강행과 정 후보자의 사퇴 결정 사이 19시간3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 대통령의 임명 의지는 강했다. 박 대통령은 15일 새누리당 지도부와의 오찬 뒤 김무성 대표와 따로 만나서도 정 후보자에 대한 협조를 당부했다고 한다. 김 대표가 16일 오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 후보자에 대해선 (박 대통령이) 사실과 다르게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야당이) 조금 협조해 주길 부탁한다”고 말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통령의 의지와는 달리 여권의 기류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15일 오후 청와대가 공식 브리핑을 통해 ‘임명 강행’ 방침을 밝히면서 “정 후보자 임명은 안 된다”는 여권 내부 보고가 청와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누리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이날 저녁 청와대에 “7·30 재·보선을 앞두고 여론에 악영향을 미친다. 재고해달라”며 임명 철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일 청와대나 정 후보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16일 당 회의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분위기를 전했다. 이외에도 청와대와 선이 닿는 여러 명의 여권 인사가 만류하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청와대 일부 참모도 ‘정성근 불가론’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새누리당 고위 당직자는 정 후보자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이 같은 분위기를 전달하기도 했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에게 정 후보자의 신상과 관련된 새로운 제보가 접수됐고, 이 의원이 청와대와 문체부에 관련 의혹을 전달하면서 기류는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관계자는 “우리 당의 제보가 여당 의원에게 넘어갔고 이를 청와대에 알린 것으로 안다”며 “일부 언론사에도 알려져 정 후보자 측으로 확인 취재가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박 대통령의 고심도 커졌다. 결국 정 후보자가 16일 아침 청와대와 막판 조율 끝에 자진 사퇴로 가닥을 잡았다는 게 다수의 여권 인사들의 전언이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부정적 여론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 후보자도 국정 운영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도 정 후보자 사퇴 소식을 16일 오전 당 회의 도중 참모들이 전달한 쪽지를 보고 알게 됐다고 한다.

 파국 직전으로 치닫던 여야 관계는 정 후보자의 사퇴로 일단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 재선 의원은 “사퇴 결정을 해준 정 후보자가 고맙더라. 오늘 임명을 강행했으면 멀쩡한 재·보선 후보들이 다 낙선했을 거다. 정말 잘된 결정”이라고 했다. 한 주요 당직자도 “만시지탄이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평했다. 김무성 대표도 대표가 되자마자 당·청 관계는 물론 여야 관계의 해법을 찾아야 하는 험난한 시험대에 오를 뻔했으나 정치적 부담을 덜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수석대변인은 “자진 사퇴라기보다는 국민 여론에 밀린 사퇴라고 본다”며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정 후보자 사퇴 전인 16일 오전 라디오에 나와 정 후보자의 과거 신상 문제와 관련, “제보가 들어온 여러 가지 사안들이 있는데, 교문위원들이 ‘입에 담기조차 싫은 내용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며 “그런 부분도 교문위원들과 의견을 나눠볼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사퇴 압박을 한 것이다.

신용호·이가영·이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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