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계 빠진 중령, 비밀 회의록 통째로 넘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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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방부 영관급 장교들이 무기중개상의 ‘미인계’에 빠져 육해공군 방위력개선사업 군사기밀 31건을 무기중개업체에 넘겨준 것으로 드러났다. 미인계에 동원된 여성은 무기중개상이 직접 채용한 20대 여직원이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현철)와 국군 기무사령부는 15일 합동수사 결과 발표에서 이런 내용을 공개했다. 영어강사 출신인 주범 김모(51·구속기소)씨는 1999년부터 프랑스 방산업체 탈레스의 컨설턴트와 해외 방위산업체 K사의 이사로 근무하며 무기거래 중개를 해왔다. 해외 방산업체로부터 10년간 무기중개 커미션(1%)과 보수로 번 돈만 54억원. 김씨는 평소 국방부 방위사업청과 각 군 본부의 영관급 장교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그는 지난해 11월 서울 강북의 한 특급호텔 바에서 일하던 여성(29)을 직원으로 채용했다고 검찰은 말했다. 이 여성은 올해 2~6월 공군본부 기획전력참모부 박모(46·구속기소) 중령, 방위사업청 국책사업단 조모(45·구속기소) 소령, 방위사업청 계획운영부 최모(47·불구속기소) 대령 등과 종종 어울렸다. 김씨가 주재하는 저녁 술자리에 동석하거나 스키장 여행, 등산에 동행했다.

 그 덕분인지 박 중령은 올해 3~6월 ‘중장거리 유도무기 도입사업’ ‘잠수함 성능개발’ ‘해상감시 레이더사업’ 등 자신이 업무상 취급하던 20개 사업과 관련된 3급 군사기밀을 김씨에게 건넸다. 15개 방위력 개선사업 비밀이 담긴 합동참모회의 회의록을 통째로 복사해 김씨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조 소령은 유흥주점 등에서 두 차례 접대를 받고 ‘소형 무장헬기 개발사업 결과보고서’를 빼돌렸다. 최 대령은 방위사업청의 비행실습용 훈련기 구매계획 등을 메모해 김씨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250만원짜리 기타와 유흥주점 접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는 미인계 외에 현금과 선물도 동원했다. 현역 장교 6명에게 현금 500만원과 체크카드 등 1000만원 상당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 현역 장교에겐 1억원을 차용한 것처럼 꾸민 뒤 이자조로 1000만원을 얹어주기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 예비역 장교 출신 ‘군피아’를 직원 또는 컨설턴트로 채용해 기밀을 빼냈다. K사 염모(41·구속기소) 부장은 대공유도탄 사격 지원체계사업 작전운용성능 등 5개 사업의 3급 비밀을 빼내 김씨에게 전달했다. 예비역 공군 정모(59·불구속) 중령도 2010년부터 K사 컨설턴트로 일하며 4개 사업 관련 3급비밀을 누설했다고 한다.

 대기업 H사 방위사업본부에 근무하는 신모(48) 부장은 2008년 입수한 해군 차세대호위함(FFX) 전력추진사업 관련 2급 군사기밀을 김씨에게 전달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김씨는 빼돌린 육해공군 방위산업 관련 기밀 31건을 영문 번역작업을 거쳐 프랑스 탈레스, 미국 BE메이어스 등 10개국의 21개 해외 방산업체와 한국지사 2곳, 한국 방산업체 L사 등 2곳 등 25개 업체에 넘겼다. 그는 특히 해외 방산업체와의 접촉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해외 출장을 갈 때는 자신의 쌍둥이 형의 여권과 인적사항을 활용, 신분을 위장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 관계자는 “방위산업 실무를 담당하는 영관급 장교들이 방산업자 및 재취업한 예비역 장교들과 수년간 부적절한 친분을 유지하며 비밀문서를 무더기로 넘긴 사건”이라고 말했다.

정효식·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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