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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DJ가 준 ‘劍’으로 DJ 두 아들 친 TK 출신 이명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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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호 30면

2001년 5월 25일, 검찰 고위직 인사를 앞두고 후배들을 위해 스스로 사퇴한 이명재 서울고검장이 청사를 떠나기에 앞서 경비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듬해인 2002년 1월 그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한다. [중앙포토]

1980년대 5공 시절 검찰은 신군부 세력의 휘하에 있었다. 검찰은 매일 청와대에 ‘특상(特上) 보고’를 했고, 안기부와 보안사에서 파견된 조정관들은 검찰 수사에 간섭했다. 검찰로선 ‘회한과 오욕의 나날들’이 많았다.

<9> 절제와 소신의 ‘검객’

이 답답한 현실의 탈출구가 특별수사활동이었다. 검찰의 목적은 크게 ▶범죄 예방과 척결 ▶사회 정의 실현 ▶국가 기강 확립 등으로 나뉜다. 검사들은 대개 특수부를 선호했다. 사회 거악(巨惡) 척결을 통한 정의 실현이야말로 그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수사는 자칫 정권 부담을 크게 한다. 81년 서울지검 특수부의 저질 연탄 수사가 그랬다. 처음에 박수 치던 여론은 업자와 ‘관피아’ 간 유착이 드러나면서 정권에 대한 원성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줄초상이 났다. 이후 중앙부처 과장급(서기관) 이상 구속은 청와대 승인을 받아야 했다.

조용한 설득형 수사 … 특별수사 귀재
80년대 중반부터 시국사건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미문화원 농성사건’ ‘삼민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국가 기강을 담당한 공안부가 해결사로 나섰다. 뒤치다꺼리를 맡은 공안검사의 방은 불이 꺼질 줄 몰랐다. 86년 건국대 점거 농성사건 때 무려 1295명의 학생이 구속됐다. 법조 출입기자이던 나는 공안부를 ‘구속 제조공장’이라고 불렀다.

이런 상황이라 기자 대 공안검사 간에는 날 선 논쟁이 오가곤 했다. 보통 특수부 검사들과의 술자리는 의기투합돼 즐거운 반면 공안부와의 술자리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86년 어느 날로 기억된다. 공안검사들과의 회식 자리였는데 서울로 갓 부임한 검사가 ‘폭탄주’를 선보였다. 우린 그때 처음 폭탄주를 접했다. 금세 술자리가 달아오르면서 호기가 발동했다. 그 검사에게 건배 제의를 했다.

“답례로 내 마음을 담아 드리고 싶다.”

모두 박수를 쳤고 그 검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냥 폭탄주는 재미없고 맥주잔에 양주를 붓고 원샷 하자.”

순간 검사들이 항의했다.

“무식하다.”
“그럼 폭탄주는 유식하단 말인가?”

그렇게 대꾸하고 나는 위스키를 두 잔 가득 따라 나부터 들이켰다. 그렇게 마시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검사도 마지못해 마셨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안검사 똑바로 해!”

그는 몇 분 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이후 만나도 되도록 나를 피했다).

당시 검사들은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자신감이 대단했다. 상대방을 쏘아보는 눈빛, 호기롭거나 권위적인 태도, 뛰어난 언변….

법조계에도 ‘스폰서 문화’가 있었다. 지연·학연으로 얽힌 변호사·기업에서 검사들의 술값이나 뒷돈을 대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술-회식 문화가 발달했다.

그러나 대검 검찰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이명재 검사는 달랐다. 85년께 그는 이미 특별수사의 귀재로 소문나 있었으나 ‘강골’ 검사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늘 자신을 낮췄다. 모범생이거나 마음씨 고운 선비 같았다.

스폰서 문화나 룸살롱과도 거리가 멀었다. 지인을 만나도 서소문 근처 조용한 일식집이나 중국집에서 가볍게 한잔 하는 것이 전부였다.

87년 민주화 이후 검찰은 안기부를 제치고 사정(司正)의 중추기관으로 부상했다. 공안부가 지고 특수부가 떠올랐다. 이명재는 대검 중앙수사부 과장과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역임하면서 ‘5공 비리’ 등 대형 수사를 주도했다.

그의 수사는 ‘강압형’이 아니라 ‘설득형’이었다. 특유의 조용한 말투로 상대방을 안심시킨 뒤 치밀한 증거와 인간적 설득을 통해 자백을 받아낸다. 피의자에게 제때 식사를 제공해주거나 겨울철 따뜻한 난로를 피워주는 배려를 해준다. 그는 내게 말했다. “구속되는 사람이 스스로 왜 구속되는지를 납득해야 성공한 수사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검찰에 새로운 인맥이 형성됐다. 노태우 정권에서 TK, 김영삼 정권에서 PK 인맥이 득세했다. 실력은 모자란데 대외관계는 활발한 ‘정치검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명재는 응집력이 강한 TK 출신이지만 이런 풍조에 휩쓸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너무 개인적으로 처신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런 중립적 태도 덕분인지 그는 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 중수부장으로 임명됐다. 호남정권의 ‘칼’로 영남 출신이 발탁된 것이다.

2013년 12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 당시 모습.

“진정한 무사는 곁불 쬐지 않는다”
2001년 봄 홍콩특파원이던 내게 신문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회부장이 됐으니 내일 당장 들어오게.”

귀국해서 오랜만에 접한 검찰은 과거의 검찰이 아니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권력에 만취된’ 모습이었다. 전·현직 검찰총장과 간부들이 여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서로 다퉈 청와대 민정수석과 법무부 차관을 지낸 인사가 구속되기도 했다. 나는 이런 모습에 깜짝 놀랐다.

2002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은 이명재 변호사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명재는 8개월 전 서울고검장으로 있다가 신승남 총장 체제가 되자 사표를 내고 나왔다. 다음 총장을 기대할 수 있는 위치인데도 ‘용퇴’했다.

그런 그가 권력 말기 온갖 악재에 휩싸인 DJ정권의 구원투수로 발탁된 것이다. 평소 과묵하던 이명재 총장은 취임사에서 뼈있는 말을 남겼다. “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검사들의 명예심을 촉구한 이 말은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는 취임 후 집기 일체를 가져오지 않았다. 책장에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았고 매일 들고 다니는 ‘007가방’이 전부였다. 언제든지 총장직에서 떠날 각오가 돼 있다는 표현이었다. 그의 지시는 단 두 마디였다. “최선을 다해 수사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이명재의 검찰이 가동되면서 난파선 같았던 검찰 분위기가 바뀌었다. 5월 김대중 대통령 3남 홍걸씨가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되고, 6월 2남 홍업씨마저 구속됐다. DJ 정권의 최고 실세 권노갑씨도 구속됐다. 당시 정치적으로 여당은 상당히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칼은 내부로도 향했다. 신승남 전 총장과 김대웅 전 광주고검장이 수사기밀 누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여론은 환호했다. 그러나 청와대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잘 마무리하라고 맡겼는데 총장이 아랫사람들한테 끌려다니기만 한다.”

김 대통령 자식들에 대한 사법처리로 고심하고 있을 때 ‘국민이 주시하는 이명재 검찰-일생일대 결단준비!’란 제하의 기사를 내가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의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사실상 구속을 촉구했다.

이 총장이 그해 여름 검찰 인사에서 소외당해 곤경에 빠졌을 때 다시 커버스토리로 ‘검찰총장 왕따작전-이명재 vs 김정길’을 보도했다.

어느 날 이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일 없습니까?”
“잘 있는데 언론이 그렇게 보지 않네요.”

그는 내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당초 이명재는 자신을 임명해준 대통령의 두 아들을 구속시킨 후 7월께 사의를 표명했으나 반려됐다. 그러나 그해 11월 검찰 피의자가 가혹행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내 책임”이라며 또다시 사표를 냈고, 청와대도 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욕망 춤추는 칼날 위에서도 초연
사실 우리 검찰에는 권력이 너무 집중돼 있다. 수사에서 구속→기소→재판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검찰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러나 권력의 집중은 부패를 부른다. 이 때문에 권력은 ‘견제와 균형(check & balance)’이 필요하다. 이 단순 원리를 우리 사법제도는 간과하고 있어 21세기인 지금에도 검찰을 둘러싼 온갖 스캔들과 분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수많은 검사들의 부침(浮沈)을 지켜보았다. 실력과 인격, 정의감을 가진 검사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도, 검사 박봉으로는 노부모 봉양이 안 돼 조용히 변호사로 나가는 모습도 목격했다. ‘정의의 사도’ 특수부 검사 중에 공명심으로 가득 찬 속물도 있었고, ‘권력의 주구’ 공안부 검사 중 애국심에 불타는 인물도 있었다.

이명재는 검사에서 총장에 이르기까지 정도(正道)를 걸었고, 존경 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평검사 시절부터 각광 받았지만 잘난 체하거나 수사에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간부가 돼서도 특정 인맥에 줄을 대거나 어설픈 보스 흉내도 내지 않았다. 그는 총장직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후배들을 위해 법조를 떠났다. 총장으로 돌아와선 짧은 기간이지만 누구라도 다루기 쉽지 않은 통치권의 비리를 파헤치고 스스로 물러났다.

대체 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절제(節制)라고 생각한다. 그는 교만과 공명심을 절제했고, 더 높이 올라가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절제했다. 평검사 시절부터 금전적 유혹, 술, 여자, 향락 등 모든 인간적 욕망과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나는 그의 뒷모습은 모른다. 그도 허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욕망이 춤추는 칼날 위에서 그처럼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언젠가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참고 걸어가는 먼 길이다. 인생의 절정기에 있던 인사들이 한 발자국 더 나가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무수히 보았다. 분수를 지키는 게 행복한 인생이다.”

그와는 30년지기다. 그러나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다. 만나면 주로 내가 말을 하고 그는 듣는 편이다. 내가 흥분하면 그는 빙그레 지켜볼 뿐이다. 그런 그와 헤어질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저 사람 반만 따라갔으면 좋겠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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