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걱정은 남보다 먼저 하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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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가 고 애산 이인형을 알게된 것은 조선어학회시절이다.
일본 명치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개업을 하고 있던 애산은 조선어학회의 산하기관인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출판관은 우리나라 사람중 책을 내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내는 사람들을 위해 뜻있는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출판사업을 했다.
애산은 가친의 환갑잔치 대신 거액을 출판관에 내놓아 책을 발간토록 했다.
그때 발행된 기념도서가 김윤경씨의 『조선문자 및 어학사』가 아닌가 기억된다.
애산은 이후부터 조선어학회와 깊은 인연을 맺기 시작해 조선어사전편찬에 거액을 쾌척하기도 했고 일이 있을때마다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졌을 때 애산은 우리와 함께 일제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3년에 가까운 옥고를 치르면서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않고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던 애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본래 집안에 여유가 있었지만 애산은 변호사개업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의혈단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변론을 자청해서 무료로 맡았고 생계가 어려운 가족까지 돌봐주어 동포들로부터 덕망이 높았다.
애산이 말년까지 「유엔」인권옹호협회의 한국이사를 역임하면서 인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있었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8·15해방이 되면서 애산은 군정하의 검찰총장을 지내고 정부주립때는 초대법무부장관으로 입각했지만 항상 권력의 행사에는 초연한 입장을 지켰다.
성격이 지나치게 직선적이어서 누구와도 타협할 줄을 몰랐다.
5·16이후 구정치인들과 함께 정당을 같이하려고 하다가 중도에서 물러난 것도 내가 보기에는 애산의 굽힐줄 모르는 성격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애산은 친구들에게 퍽이나 관대했다.
애산·나·이병당·윤일선·김두종등 병신년(1896년) 동갑나기들이 한 번은「병신구락부」를 조직하자고 했었다.
애산과는 상경하는 사이가 아니고 벗을하고 있었던 관계로 나는 애산이 회장을 하는게 좋겠다고 권했다.
애산은 영문을 몰라 왜 자기가 회장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내가『자네야말로 명실상부한 병신이 아닌가』고 농담을 걸었더니 애산이 화를 내기는커녕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평소 소아마비 때문에 늘 신체적 부자유를 느끼고 있던 애산에게 내가 좀 심한 농담을 한것같아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들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애산의 넓은 도량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산은 친구들을 좋아해서 매년 생일때면 꼭 20여명의 친지를 음식점으로 초청해 저녁을 같이했다.
건강이 좋았던 작년까지만해도 백악준·김홍일·오범수씨등과 함께 일년에 서너번은 반드시 만났고 용문사·신갈호수 등을 즐겨 찾았다.
조선어학회사건이 10월1일 발생했다고해서 그때 동지들이 결성한「10·1회」모임에는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고 지금 신문로에 있는 한글학회회관은 애산이 3천만원을 선뜻 내놓아 비로소 착공된 것이다.
애산은 늘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악이악(세상 걱정은 남보다 먼저하고 세상의 즐거움은 남보다 후에 취한다)의 신념으로 세상을 살았다.
이제 애산은 비록 갔지만 그가 우리에게 심어준 고귀한 뜻은 영원히 간직 될 것이다. <필자=학술원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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