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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한태경씨,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북간도의 한국인〉북경에 온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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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만주땅 우리동포들은 어려움속에서도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 애쓰며 꿋꿋하게 살고 있다-. 33년전에 헤어진 부모·형제를 만나보기 위해 작년 12윌5일부터 약 한달간 중공의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찾았던 재미교포 한태경씨(53·「워싱턴」한인봉사「센터」총무)는「자치주」안의 동포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본지는 중공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의 생활과 미·중공수교를 전후한 중공의 표정등을 한씨의 구술로 독점 연재한다. <편집자>
차장이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차창으로 밖을 보니 아침밥을 짓는 시골풍경이다. 장춘에서 기차를 탄지 13시간30분만이었다.
어머니. 고향.
1946년 3월, 나서부터 20년동안 살아온 고향을 떠난 지 33년만에 다시 보는 어머니와 고향땅 생각으로 내가슴은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연길.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청소재지. 역은 나를 마중 나온 친지 동포들 50여명으로 북적대고 있었다.
어머니(김금순·71)는 그동안 가슴에 새겼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이미 아니었다. 얼마전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생(태근·39)이 보내준 사진으로 늙으신 모습을 상상은 했지만 백발과 주름진 얼굴은 기나간 세월의 불효를 통감케했다.
어머니와 동생부부, 두 조카가 살고 있는 집은 다른 동포들 집과 비슷한 구조로 여전히 온들을 사용하고 있는 20여평 규모의 소옥이었다. 다만 예전과 다른 것이라면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고 공중변소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다 좁은 면적에 변소까지 지을 여유가 없어서인 모양이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는 한달동안 나는 큰 불편을 겪었다.
〈공안국서 여행자안내〉
연길에는 외국인 여행자를 안내하는 여행사가 없기 때문에 공안국(경찰국)외사과직원이 나를 담당했다.
그들이 제공한 승용차로 나와 어머니는 집에까지 갔으며 다른 환영객들도 공안국 「마이크로버스」를 빌어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빈관(호텔)에 안내되지 않고 어머니 집에서 묵을 수 있었던 일이라든지, 「마이크로버스」제공 등은 상당한 특별배려로 미·중공수교덕분이 아닌가 싶다.
얼마전 「스위스」여인과 결혼한 이곳출신 한국인이 친척들을 찾아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때 그는 꼼짝없이 빈관에 앉아 상·하오 정해진 시간에만 친척과의 면회가 허용됐었다고 한다.
내 경우는 예외로 받아들여졌는지 어머니도 『신의 가호』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묵게된 동생집은 매일 몇백명씩의 동포들이 나를 보려고 찾아와 교통차단이 될 정도로 붐볐다. 헤어진 채 소식을 알 수 없는 친지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느냐는 사람, 미국의 생활은 어떠한가고 묻는 등 같은 얘기를 수천번 되풀이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내가 태어난 노두강를 찾았다. 연길에서 40리거리다. 이곳에서 나는 많은 낯익은 할머니들을 만났다. 코흘리개시절의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귀여워해주던 아주머니들이었다.
〈선친묘의 흙한줌 간직〉
뛰놀던 동산, 생가도 옛모습 그대로였으나 사람들만 변했다.
조모와 12년전에 돌아가신 선친도 이곳에 묻혀있다. 돌이켜보면 가족과 생이별을 한 것은 33년째이나 14세때부터 중학에 간다고 집을 나와 살았기에 아버님 생전에 냉수 한 그릇 내 손으로 떠드려지 못한 불효자가 바로 나였다. 나는 묘지의 흙한줌을 떠 고히 간직했다.
46년 북한청진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가 다시 국경을 넘지 못하고 평양-해주-서울을 전전하다가 서울서 신문배달로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나는 침례교회 목사로 64년까지 한국에서 살았으며 그후 미국으로 건너가 영주했다.
가족들이 아직도 이곳에 무사히 살고 있다는 소식은 미국에 가기전에 우연히 보내본 편지를 통해 알았으나 직접 고향땅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라곤 좀처럼 생각지 못했던 일이어서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 모두가 내겐 귀한 선물이었다.
이곳으로 나를 인도한 편지 한 통, 그것도 실로 극적인 것이었다. 지난62년 「홍콩」에 간 기회에 「헛일삼아」 옛날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전만주국간도성연길현노두청 일패삼호」김금순귀하-. 편지는 다행히 연길시로 이사나와 살고 있는 가족들 손에 들어간 모양인지 회답이 왔다. 내 주소를 일본에 사는 친구네집으로 했기 때문에 동생의 편지는 일본으로 배달됐다. 나는 친구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들었다.
『살아들 있구나-.』 간단한 안부에 그친 첫 교신이었지만 33년, 막혔던 긴세월이 한꺼번에 뚤리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75년부터 50불씩 송금〉
그후 미국에 가서는 더욱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고 3년전부터는 「뉴욕」의 「채이스맨해턴」은행을 통해 매달50「달러」씩 송금도 했다. 자동차수리공장에서 일하는 동생의 한달 월급이 미화로 칠 때 25「달러」밖에 안돼 내가 보내는 돈은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내가 어머님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배경당국에 처음「비자」신청을 한 것은 4년전 이었다.
×××
군복차림의 남자들이 비행기 주위를 죽 둘러선 북경공항은 왠지 으스스했다. 내가 보아온 다른 비행장에 비해 초라한 느낌이었다. 밤11시30분이었다.
북경여행사에 전화해 외국여행자용 「택시」를 불러타고 「호텔」안내를 요청했다.
첫번째 안내된 「호텔」에선 여행사의 지시가 없어 방을 내줄수 없다고 거절했다. 「호텔」담당 여행사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뒤라 확인할 길도 없어 다른「호텔」로 갔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행히 영어를 아는 「호텔」종업원이 내 신분과 여행목적을 설명들은뒤 한 여행사직원 집으로 전화해 그를 불러냈다. 자유로운 여행이 제한되고 있는 이곳에선 외국인의 경우 여행사 안내원 없이는 한발짝도 옮기기 어렵게 돼있다.
「호텔」에 방을 잡고 누우니 새벽2시가 넘었다. 중공에서의 첫밤이다. 나는 작년12월4일 「워싱턴」을 출발, 5일 일본 「나리따」(성전)공항에서 북경행 「이란」항공으로 옮겨 탔다.
74년 북경당국의 외교부장(외무장관)앞으로 진정서와 함께 입국신청서를 처음 보낸이후 꼭 4년만에 얻어낸「비자」였다.
〈으시시했던 북경공항〉
처음엔 30여년간 헤어져 사는 부모·형제를 만나보고 싶으니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허가해달라는 진정서를 영어로 작성해 「비자」신청서와 함께 보냈다. 회답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차례끝에 다시 잘 아는 중국인을 시켜 진정서를 중국어로 써서 보냈다. 마찬가지로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여섯번째 진정서를 북경으로 보낸지 한참뒤인 지난해 11월11U일 입국허가사실을 북경당국의 「워싱턴」 주재연락사무소가 전화로 알려왔다. 드디어 재회의 꿈이 실현됐던 것이다.
북경의 아침은 자동차「클랙슨」소리로 시작되는가 싶었다. 『뿡, 뿡』소리에 잠을 깨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가득히 자전거가 밀려가고 밀려오고 있었으며 이를 피해 다니느라 자동차들이 있는대로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일부러 남보다 큰 소리를 낼수있는 경적으로 갈아끼우는 사람들도 많다는 「호텔」종업원의 얘기였다.
자동차가 별로 많지 않아서인가, 경적제한규칙 같은게 없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하오 다시 장춘행국내선 여객기로 2시간을 날아 장춘공항에 도착했다.
「보잉」707기 같았는데 몹시 낡아 공연히 불안했다. 「옌」(연)씨라고하는 장춘여행사 안내원이 마중 나와 「택시」로 곧장 장춘역으로 안내했다.
역으로 가는 길에 이 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자동차공장을 잠깐 구경했다. 「옌」씨는 『이곳이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같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장춘시내의 옛 대동대가는 「스탈린」대가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그때 있던 은행·우체국건물등 낯익은 집들이 감회를 새롭게 했다. 역앞에 있던 「고다마」(소옥)공원도 그대로였으나 일본의「고다마」대장 동상자리엔 모택동동상이 대신 서있었다.
영하20도를 오르내리는 장춘의 날씨는 몹시 추웠다. 여행사 안내원의 말대로 옷을 있는대로 꺼내 껴 입었는데도 얼굴이 아렸다.
하오7시 연길행열차에 올랐다. 역구내도 30여년전과 달라진게 없었지만 VIP용 출구가 따로 있는게 색달랐다. 나도 이 귀빈용 출구를 통해 「플랫폼」으로 나갔다. 바닥엔 붉은「카피트」가 깔려 있었고 제복을 입은 젊은 여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송했다.
나는 연길의 어머님댁으로 나의 도착시간을 알리는 전보를 보내도록 안내원에게 부탁한 뒤 침대칸으로 들어갔다.
침대칸 한칸엔 침대 4개와 함께 작은 탁자가 있었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준비가 돼있었다.내가 탄 칸에는 나말고 다른 승객은 없었다.
〈전력모자라 정전잦아〉
이 나라 전체가 전력난을 겪고 있는 듯 거리가 그렇게 깜깜할 수가 없었다.
「네온·사인」은 물론 가로등마저 귀한 거리는 칠흑같이 어두워 차창으로는 아무것도 볼수 없었다. 나는 동생부부와 어머니를 위해 준비해간 전기밥솥등 전기제품이 별로 그들에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에 가서야 「학인」 했지만 이때 이미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지 않은 기분을 어렴풋하게 느꼈었다.
동생에게서 들은 얘기론 특히 연변지역은 전기가 모자라 전기제품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일대의 전력수요를 충당하는 송화강의 풍만「댐」은 일제때 건설된 그대로여서 그동안 시설확충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정전이 잦았으며 전력부족으로 앞으로 3개월간 공장문을 닫게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렇게 고향에 돌아온 나는 어머니곁을 떠난지 33년만에 다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탄절을 어머니·동생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날은 성탄찬송가도, 예배도 없는 정말「고요한」밤이었다.
종교가 인정되지않는 이곳에선 「크리스머스」라고 특별한 날은 아니어서 우리는 몰래 마음속으로 기도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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