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말문을 열기 전에 질문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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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내가 말 좀 할라치면 “또 말장난?” 하며 제동 거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를 ‘제동씨’라고 부른다(방송인 김제동씨와는 아무 상관없다). 재미로, 선의로 시작할 때도 그는 경고등을 켠다. 기죽을 내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마지막 문이 막는구나. 앞문도 아니고 뒷문도 아닌 너의 질문.” 그는 또 묻는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런 말을 여기서 왜 해?” “했던 말을 지금 또 하느냐?” “또 합리화?” 마치 까다로운 편집자 같다. 그에게 별명 하나를 더 붙여 준다. ‘또또선생’. 집요하게 묻는 그를 가끔은 묻어 버리고 싶다.

 이제 나는 결정해야 한다. 그와 인연을 끊고 더 이상 상대 안 할 것인가. 존재를 무시한 채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시비를 우정 어린 충고로 받아들여 말과 글을 절제할 것인가. 고심 끝에 3번을 골랐다. 여러 사례를 통해 볼 때 그의 쓴소리가 나에게 손해보다 이익을 준다는 걸 터득했기 때문이다.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었던 셈이다.

 속담마을에는 별 사람이 다 산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은 사람도 나온다. 현실에선 어떤가. 말 한 마디 때문에 몰매 맞고 위치까지 바뀌는 경우를 적잖이 본다. 관심 받으려다가 인심의 무대에서 추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마음에 담아 두고 충분히 삭혀야 할 생각을 채 익기도 전에 말이나 글로 방출하려는 심리는 또 뭘까. 용기일까, 객기일까, 아니면 신념일까.

 윤리시간에 배운 말은 이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교실 밖 풍경은 어떤가. “나는 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기야 데카르트도 생각만 한 건 아니고 말(글)로 발표한 걸 보면 표현 욕구는 동서고금의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말 한 마디의 빚이 있다면 말 한 마디의 빛도 있다. 어둠의 말로 한평생 빚지지 말고 등대의 말로 세상을 밝혀 주는 연습, 말문을 열기 전에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하는 훈련을 꾸준히 하는 게 어떨까.

 이제부턴 반전이다. 조금 허탈해질지 모른다. 사실 제동씨와 또또선생은 꾸며낸 인물이다. 그런 친구는 내 가까이에 없다.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대신 마음속에 상주해 있다(마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배경음악 ‘고래사냥’에 나오는 ‘한 마리 예쁜 고래’처럼). 이 친구 덕분에 실수를 줄인다. “말솜씨 좋다.” “언어의 마술사로군.” 이러면서 띄워 주는 친구는 제동(制動)씨가 아니라 선동(煽動)씨다. 그들은 선풍기가 꺼지면 주변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친구의 본심과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의 허탈함을 나는 안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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