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연작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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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로부터 22년이 흘러간 1948년의 겨울이었다. 그날에야말로 아침부터 눈보라가 잠시도 멎지 않고 기세를 부리더니 저녁나절에야 잠시 뜸한 때를 타서 나혜석여사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여사는 내손을 잡고 『모쪼록 건투하세요. 다 풀지 못한 우리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살면서 많이 써주셔야죠』하였다.
처음으로 상면한 그의 부탁이 너무도 절절하여 나도 그의 손을 되잡으며 찬찬히 그를 살펴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풍문으로나 사진으로나 그는 재기와 활기가 있는 예술가임에 틀림없었고 그의 글에서도 영롱한 총명을 감득할수 있었는데, 모진 풍상이 얼마나 그를 학대하였으면 저렇게도 변하였을까 싶게 활기와 패기라고는 그의 모습 어디에서라도 볼 수 없었고 간절하게 말하는 음성조차에도 힘이 들어있지 않아서 참으로 처량한 심사를 금하지 못하였다. 최초이며 최후이던지 한번의 상봉이었지만 이날까지 그 장면과 그 음성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서 무한히 솟구칠 능력이 무참히도 여사의 별세와 함께 영겁에 묻혀버린 것이 너무나 아깝고 애달프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 무렵에 나와서 문인들에게 지면을 빌려주던 잡지들을 살펴보면 「개벽」지를 비롯하여 「생장」지, 「여명」지, 「문예 운동」, 「신민」, 「신여성」, 「가면」, 「문예시대」등등인데 이들은 짧거나 오래거나 그것들이 계속하는 동안에 의욕이 넘치는 젊은 문필인들에게 발표할 기회를 준것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그때 동아일보사에서는 「신동아」라는 종합잡지와 「신가정」이라는 여성 잡지를 발간하여서 「신동아」는 주요섭씨가, 「신가정」은 이은상씨가 각각 주간이 되어있었고, 「신동아」에는 고형곤씨가, 「신가정」에는 김자혜씨가 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두 잡지는 초창기부터 의욕과 포부가 대단하여서 재래식보다 좀더 색다르고 신선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보였다. 「신가정」지에서는 여자들만의 연작소설을 시도해 보겠다면서 첫번째의 출발을 내가 하되 그 제목까지를 맘대로 선정하라는 청탁을 해왔다. 어리둥절해진 내가 처음엔 거절하는 응답을 보냈으나 그 이유를 상세히 적어보내면서 재삼 부탁하여 하는 수 없이 『젊은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1회를 써 보냈다.
지금엔 연작을 한 작가가 한 소재로 계속 써내는 것을 말하는 모양이라 그 시절에 여러 작가가 한 제목하에서 쓰는 것을 연작이라고 알고 있던 나는 좀 당황해지기도 했다.
2회는 강경애, 3회는 백길애, 4회는 장덕조, 최종회가 김자혜여서 모두 5회로 끝난 『젊은 어머니』는 처음에 내가 의도했던 것과는 약간 빗나갔으나 생면부지 만난 일도 없고 소설내용에 대하여 서로 말 한마디 주고 받은적도 없는 사람들끼리가 그래도 어떻게 줄거리와「플로트」의 계통을 세워 그런대로 하나의 작품을 이루었는데, 최종주자인 김자혜씨는 수필가였으나 작품 전체의 호흡과 분위기를 살려 맨 마지막의 종결을 그럴듯하게 잘 맺어서 나는 은근히 감탄도 했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평가는 제쳐놓고라도 처음으로 시도해본터라 재미있다고도 하였다.
이래저래 여기저기에서 내 이름이 자주 나오니까 이 신문, 저 잡지 할것없이 소설과 수필등을 청탁하는 편지가 하루에도 몇통씩이나 멀리 날아왔으나 워낙 둔재여서 다 응할 수는 없고 마음내키는대로 재주껏 정성껏 써보내자니 가정 잡무에 매인 몸은 언제나 바쁘기만 하여 좀체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들에게서도 한번만 다녀가라는 재촉이 있던 차에 『백화』를 출판해 주겠다는 출판사가 나타난 것을 기회로 용단을 내어 서울행을 감행하였다.
나는 이미「신가정」지와 인연을 맺은 터이라 내가 서울에와서 맨먼저 만난 여성은 김자혜양이었다.
나의 상경을 알자 나의 유숙처로 이은상씨와 김양이 찾아온 것이다. 키가 날씬하게 큰 김양은 노산이 나를 소개하자 『지면으로만 뵈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하는 말소리마저 용모처럼 고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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