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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1)|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50년전 "문예"지 전후(44)-지방공연
현대문학사의 두번째 문인극에는 최인호 오혜령 김혜숙 김국태 최원 오찬식 김용운 등 젊은 작가들과 함께 박영준(작고) 황순원 최정희 세분도 출연했는데 이분들은 한두 마디 대사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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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2)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50년대 "문예'지 전후(35)
결혼식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월탄 선생의 자부와 신부가 될 손녀가 또 집으로 찾아왔다. 신부 모녀로서 주례에 대한 인사를 차리기 위한 것이었다. 월탄 선생께서 몸소 찾아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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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5) -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50년대 "문예"지 전후(제58화)
뒤이어 「나는 이남 출신이지만 대한민국파다. 지금 우리 나라 국회의원을 출신별로 나누어 보면 90%가 이남출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남파 국회인가, 대한민국 국회인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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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244)|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50년대"문예"지 전후|한연호⑦|평론『문학과 사상』
이 무렵 어느 사이엔가 나는 시에서 평론 쪽으로 나도 모르게 그 방향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시를 처음 발표한 것은 중학교 다닐 때의 학생난 이었지만 기성의 대우를 받고 시가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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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240)|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50년대 "문예"지전후|??③|동인지『백맥』
명동 어느 친지의 사무실에「예술부락」이라는 간판만 달아 놓고 일은 주로 다방에서 했다. 자금을 댄 김군이 사장이었고 나는 주간이었으며 사원은 한사람도 없었다. 창간호에 들어갈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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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5)|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40년대 「문장」지 주변 (64)|신문 소설 경쟁|정비석
나는 신장이 1m64cm 체중은 55kg을 넘어 본 일이 없는 왜소한 체구다. 그러나 글을 쓰는 정력만은 남 못지 않게 왕성한 편이어서 40대에는 신문과 잡지에 연재소설을 5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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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4)|제58화 문학지를 통해본 문단비사-40년대「문장」지 주변 (63)|늦게 손댄 사업|정비석
내가 문학과 영원히 손을 끊으려고 세번째로 문학을 배반했던 것은 4·19혁명 후의 일이었다. 무어 연대학생들에게 「데모」를 맞는 바람에 글쓰기가 겁이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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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3)|제58화 문학지를 통해본 문단비사-40년대 「문장」지 주변 (52)|학생들과 대좌|정비석
나는 처음에는 전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눠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1천6백여명을 상대로 대화가 성립될 리가 없었다. 신문사와 학생들과 쌍방이 협의한 결과 학생 대표 5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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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2)|제58화 문학지를 통해본 문단비사-40년대 「문장」지 주변 (61|몰려온 연대생|정비석
l960년4월19일. 4·19학생 「데모」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자 나는 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거의 매일같이 거리로 달려나와 학생들의 동태를 세밀히 관찰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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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9)문학사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 「문장」지 주변(48)청빈한 주요섭|정비석(제자 정비석)
내가 가깝게 모셔오던 선배작가 중에는 명작단편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이 있다. 주요섭은 원로시인 주요한의 아우로서 신문학초창기부터 작품활동을 해오신 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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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8)|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40년대 「문장」지 (제58화)
김억은 우리 나라 서정시의 시조다. 그 자신이 남겨놓은 문학적 업적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평북 귀성 산속에 파묻혀 있는 김소월을 발견해 내어 대시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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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7)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문장」지 주변(46)|금동의 문재|정비석(제자 정비석)
중앙신문을 반년만에 그만둔 뒤에 하루는 왕십리자택으로 김동인을 방문했던 일이 있었다. 신당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미군에 빼앗기고 하왕십리로 이사간 직후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이삿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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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6)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문장」지 주변(45)|선비 김동인|정비석(제자 정비석)
해방된 지 3년째 되는 47년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때까지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서 아직 「타블로이드」소형판을 내고 있었을 때, 대형판으로 새로 창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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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문학사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문장」지 주변(44)|친일파 시비|정비석(제자 정비석)
이왕 말이 난 김에 해방후인 만년의 김동인의 이야기까지 써 버리기로 하자. 해방 직후 임화·김남천 등의 좌익계열 문인들이 주동이 되어 소위「중앙문화건설협의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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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4) - 문장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문장」지 주도(제58화)
김동인에게는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소설을 쓰게 된 데는 일반 독자들이 잘 모르는 「비화」가 있다. 이왕이면 이 기회에 그 이야기도 공개해 보기로 하자. 그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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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6)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 「문장」지 주변-제58화
아무 죄도 없이 유치장으로 끌려간지 만4개월 만인 40년 3월에 무죄석방이 되어 나오는 길로 나는 장질부사를 앓아 눕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인줄 알고 가까운 병원에서 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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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7)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예일인지시(46) 백철
37년 여름 나는 다시 낙향하여 약1년동안 고향에서 세윌을 보낸일이 있다. 먼저글에 이무영등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이때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간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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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156)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단일인고시대(35)
내가 2년가까이 문단과 떠나서 그 「우수의 성사」에 들어가 있는동안 문중의 풍토도 많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같다. 평론계만해도 이미 정월이나 임×의 시대는 아니었고 최재서 김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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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155)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단일인명시대(34)
출감 12월21일 아침 간수장이 감방복도에 와서 석방되는 사람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내 방의 「호오지끼」(보지기)가 떨어졌다. 「록뺘꾸하찌주규고오」 (689호)!. 석방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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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149)-문학자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예 일인지 시대(28)
우리나라 신문의「신춘문예」행사가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행사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문인들이 배출된 것은 30년대 초 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무렵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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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8)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석담구곡
평양에서 나는 해주로 갔다. 석담구곡을 찾고자 함이었다. 해주에서 한시간쯤 깊숙이 들어가면 고산석담이라는 명승지가 있는데, 율곡 이이가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하여 이곳에 구곡을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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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7)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고도여행
「백화』는 출간되었다. 『빛나는 지역』이 적색 포의양장에 금색의 제자로 「케이스」까지 갖춘 호화판의 책자임에 비하여 같은 국판이긴 하지만 『백화』는 흰색의 표지로 조촐하고 아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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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6)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초대받은 문인들
동글납작한 얼굴에 안경을 쓰고 시종 웃음을 띤 겸손한 자세의 그 청년을 춘원은 우리에게 독일에서 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어제 귀국한 안호상씨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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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5)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춘원과 모윤숙
춘원과 영운(모윤숙)과 나 셋이서 만나기로 한곳은 정문에서 들어가자면 우측인 연못가였는데 정각에 늦지도 않았건만 두 사람은 먼저 와서 정자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밀담을 나누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