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8)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석담구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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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양에서 나는 해주로 갔다. 석담구곡을 찾고자 함이었다. 해주에서 한시간쯤 깊숙이 들어가면 고산석담이라는 명승지가 있는데, 율곡 이이가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하여 이곳에 구곡을만들어서 산수풍월로 심신을 휴양하며 소일하었던 곳이다.
나는 일찍 석담의 유래와 경승을 들은 후로 언젠가는 반드시 이곳을 탐방하여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석담구곡의 기행을 한국 최초로 발표해 보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여로도 까다로운 이 여행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나는 선비에대한 대접으로 주점에서 청주두병과 마른안주 약간을 사 들었다. 때는 이른 겨울인데 잣나무와 소나무로 하늘도 보이지않는 숲속 길을 걸어 율곡의 후손인 이씨댁을 찾았다.
덩실하고 네모가 번듯한 건물이 율곡서원이라고 하고 그 뒤쪽 조금 높은 지대에 이씨의 기와집이 역시 숲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침 10여세쯤되는 머리를 땋아내린 총각이 그 집에서 나오기에 손이 왔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흰두루마기에 망건을쓴 중노가 나왔다.
젊은 여인 혼자서 손가방은 팔목에 걸고 술병과 안주봉지를 안은채로 올연히 서있는 모습에 그는 당황해하는 표정이 되어서 나직하게 물었다.
『어떻게 뉘길 찾아 오셨습니까?』
『선생님을 뵈올려구 먼데서 왔어요.』
『나를요?』
그는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께를 가리키며 눈을 더 크게 했다. 나는 간단히 내방의 연유를 말했더니 그는 즉시 내당으로 안내하여 젊은 두 여인을 나오게하였다.
살결이 희고 귀염성과 고움을 갖춘 여인들은 자부인듯 한 아낙은 복성스럽게 생긴 딸애를 안고 마루끝에까지 와서 나를 맞아들였다.
좌정후 대강대강 여러가지를 고루 들려준 주인은 자부들에게 눈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잣송이랑 좋은걸루 골라내오구』하는 말을 덧붙였다. 예쁜 얼굴에 시종 웃음을 담은 자부들은 감과 엿과 잣송이를 상냥스러운 말씨로 내게 권했다.
내가 한쪽에 놓았던 선물 (?)을 자부들께로 밀어보냈더니 아이를 안은 댁이 『뭘 이런거까지 다 가지구 오셨나요? 그냥 찾아주신 것만두 반가운데』하고 깍듯이 답례를 하여 교양미를 풍겼다. 주인이 높다란 정각을 가리키며 율곡선생의 사당이라 하여서 좁은 돌층계를 올라가 주인이 열어주는 사당에 참배하였다. 그 안에는 율곡의 영정과 필적들이 모시어있었다.
이씨는 손자 (집앞에서 만난 총각애) 에게 나의 안내를 명령하여서 나는 잠시의 인연을 맺었던 자부들의 전송으로 대문을 나으니 서원앞에 서너명의 머리딴 총각아이들이 신기한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당 동무들예요. 서원을 서당으로 쓰고 있거든요』
이동자가 선선히 귀띔해 주었다.
일곡은 관암이요, 이곡은 화암인데 나그네의 길이 바빠 멀리서만 그림 같이 호수에 잠겨 있는 절승을 바라보면서 삼곡인 취병으로 돌아드니 송림으로 덮인 기암이 푸른 물에 잠겼고 일엽편주가 가랑잎처럼 떠 있었다.
길길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사곡인 송애에 이르러 나는 창조 이전의 신비로움을 그 응장한 봉과 깊은 소에서 처음으로 느낀듯한 황홀감에 취하였던 것이다.
오곡이라는 은병은 율곡의 서재이었던 청계당을 안고있는 그야말로 승경중에서도 아기자기한 절승이었다. 널따란 계곡에는 기기묘묘한 작은 암석들이 박혀있어 흐르는 물에서 생긴대로의 길고 짧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백천가지의 물소리를 내고있었다.
그 변화무쌍하고 청냉한 물소리를 들으며 학문을 연구하던 그날의 그분이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싶어 부럽기 그지 없었다. 육곡은 조협이라 이름 그대로 버들숲에 싸인 조대가 푸른 소에 잠겨 솟아있고, 칠곡은 풍암인데 깎아지른 절벽에 울긋불긋남은 단풍이 백길 물속에 고운그림자를 펼치고 있었다.
팔곡은 금탄이라 청계당의 계곡을 확대시킨듯 돌을 차며 흐르는 물소리가 간담마저 서늘하게 울렸다. 청계당의 물소리가 여성적이라면 금탄의 물소리는 남성적으로 호방하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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