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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7)<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예일인지시(46) 백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37년 여름 나는 다시 낙향하여 약1년동안 고향에서 세윌을 보낸일이 있다.
먼저글에 이무영등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이때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간것도 그런뜻이있었는지 모른다. 소위 「대동아전쟁」이라고 해서 일제가 대륙침략전쟁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해 여름의 일이었다.
더운 여름날 오후 나는 내가사는 비현거리 앞을 흐르고 있는 조그만 냇가에 나가서 얕은물에 몸을 잠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갑자기 남쪽으로부터 요란한 폭음소리가 들려왔다. 비행기의 편대였다. 처음엔 나란히 석대가 나타나 내머리위를 지나서 국경쪽으로 갔다. 그러나 비행기는 한편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석대씩의 편대, 또 다시같은 편대…로 계속해서 수십대의 전투기가 고요한 마을의 하늘을 진동시키며 북으로, 서북으로 날아갔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비행기가 한꺼번에 날아가는것을 본일이 없다. 무슨일이 벌어졌구나.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랫동안 마음을 안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저녁을 기다려 「뉴스」시간에 「라디오」「다이얼」을 돌렸다. 예감대로였다. 북경남쪽인 노청교라는데서 「일지군의 총돌」 이 생겼다는것이다. 「라디오」의 음성은 몇번씩이나 거듭해서 이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이튿날부터 국경으로 통하는 연도에 위치해 있는 비현거리를 매일같이 일장기를 달고 병대를 가득실은 기차들이 연속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은 급한 풍운의 세월에 접어든 것이다.
뒤숭숭한 가운데 여름이 가버리고 초가을답게 산들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정비석한테나 가보리라고 했다. 비석은 내가 사는 비현지방에서 멀지 않은 용천의 양시에서 가까운 장송동 마을에 살고있었다.
장송동은 용천지방에서 부촌의 하나이면서 정씨의 마을이기도했다.
그 마을은 비석네 형제가 지주들이고 나머지 20호가까운 집들은 모두가 이 정씨집안에 달려있는 소작인들로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만큼 비석은 큰부자는 아니지만 알차고 여유있는 중산층의 집안이었다. 비석은 그때 『나낙』이란 소설을 완결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읽고 『성황당』 보다 우수한 역작이라고 했다. 그런데 뒤에 들은 이야긴데 비석은 그 작품을 경성으로 보낸다고 자전거뒤에 놓고 양시거리로 나가다가 떨어뜨려 분실했다는 것. 아까운 일이었다.
나는 근20일간이나 비석한테 묵으면서 그세월속의 문학이야길하며 지냈다. 비석의 형네집안들은 동생의 문학친구라고해서 돌아가며 저넉초대를 해주었다. 특히 비석의 부인은 지루하게 묵고있는 식객을 하루같이 융숭하게 대우해 주어서 나는 호강을 하고 온것이다.
초겨울이 되어 이번은 비석이 비현으로 놀러왔다. 같은 중학때부터의 동창으로서 김인직이란 친구가 대서방을 내고 있었다. 세사람이 삼총사가 되어 저녁이면 밤이 늦도록 술집 순례를 하였다.
술집을 색주가라 했다. 내가 사는 동쪽거리에서 멀지않은 언덕배기에 있는 한 술집에 제법 예쁘장한 여인이있었다. 김인직이 고래같이 술만마시는동안 비석과 나는 그여인을 중간에 놓고 실없은 승강이를 펴기도 하였다. 전난의 세월중 한토막의 사치스러운 「에피소드」 같은 것이리라.
이듬해 여름이 되었다. 비석과 나는 일행이 되어 원산행을 하였다. 세월도 그러니 잊어버리고 해수욕이나 하며 지내보자는 생각이었던 듯하다. 경비는 역시 비석이 담당을 하고 나선것이다.
그런데 원산으로 떠나기전의 이야기이다. 김인직과 내가 색주가집에 자주 드나들고 있는 동안 이번은 정말로 인물이 고운, 그리고 술집색시답지않게 순진한 처녀같은 색시 하나를 발견하고 우리는 자주 놀러 다녔다. 김인직의 말이 그 색시만은 자기편에서 크게 양보해 내게 일임을 한다는 것이었다.
원산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김인직과 헤어지면서 다짐을 하다시피했다. 『자네 약속지켜야하네, 그 여성한테는 손끝하나 대선 안되네-』하고 비석과 나는 원산으로 갔다. 두사람은 난중의 세월이나마 해수욕을 즐기면서 두사람의 이름으로 김인직한테 우리둘만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뜻의 편지를 쓴것이다.
며칠있다가 김인직한테서 회신이 왔다. 봉투안에는 비석과 나에게 각각 따로 편지를 써넣고 있었다. 내게 온 글은 이랬다. 『실은 자네한테 퍽 미안하게됐네. 내가 약속을 어기고 그 여성을 차지해버렸네, 용서하게. 자네아닌 남이 그 여성을 차지할바에야 자네 친구인 내가 차지한것이 나을것 아닌가…』하고.
편지를 읽고 『나쁜 친구…』하고 중얼거렸더니 비석이 옆에서 뭘갖고 그러느냐고 해서,그이야길했더니 『그 친구 족히 그럴수있지…』하고 웃었다. 나도 따라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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