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정비석>(2234)|제58화 문학지를 통해본 문단비사-40년대「문장」지 주변 (63)|늦게 손댄 사업|정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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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문학과 영원히 손을 끊으려고 세번째로 문학을 배반했던 것은 4·19혁명 후의 일이었다.
무어 연대학생들에게 「데모」를 맞는 바람에 글쓰기가 겁이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4·19 이후에는 과도 정부를 지나 장면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학생「데모」가 거의 날마다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처럼 극도로 혼란 된 사회에서 글을 써먹고 산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나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 직업을 또 다시 바꿔 보려고 했던 것이다.
마침 그 때 송지영이 일본에 갔다가 세계 3대 광고 대리점의 하나인 「일본 전통」의 한국 대리점을 맡아 가지고 돌아와서, 나더러 일을 같이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본 광고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서 모든 국내 신문들이 일본 광고에 무척 탐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전통」의 대리점을 맡아왔다는 것은 가만 앉아서도 돈을 벌 수 있는 특권이었다.
송지영과 나는 평소부터 뜻이 맞는 친구다. 지영은 체구는 작아도 통이 크고 외교에도 능한 편이지만, 보자기를 펼쳐 놓기는 잘해도 뒷갈미를 하는데는 지극히 서투른 친구다. 지영에게 비기면 나는 훨씬 사무적인 편이기에, 나는 지영과 손을 잡고 그 대리점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전통 대리점이란 전국 각지의 각 신문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다달이 일정량의 일본 광고를 제공해주고 이쪽에서는 「마진」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사업으로서는 절대 안전한 사업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중학동에 사무실을 버젓하게 차려 놓고, 국도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있는 고병순을 전무로 데려오는 동시에, 지영이 사장이 되고 나는 부사장이 되어, 각 신문사와의 계약 체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일류 신문의 광고 단가가 1행에 40원이었는데, 우리들은 국제 시세를 고려하여 일본 광고는 국내 광고료의 7배인 행 당 2백80원씩 주기로 했기 때문에 국내 신문사들은 앞을 다투어 계약을 해주었던 것이다.
사업의 기반이 그렇게 닦여지자, 일본 전통에서 조사원이 내한하여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계약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송지영과 나의 신용도를 내사해 보았다.
그런데 각 신문의 사장들은 『그들 두 사람의 사업 능력은 알 수 없어도 그들이 협잡만은 안할 사람들』이라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결같이 말해주어서, 일본 전통에서는 대리점 인선이 잘 되었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개시할 판이기에, 나는 다시는 글을 쓰지 않을 결심에서 어느 신문지상에 『문학과의 결별사』라는 글까지 발표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팔자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면할 수 없는 법인지, 일본에서 나온 그 조사원이 일본으로 막 떠나려는 날 새벽에 5·16혁명이 일어나서, 모처럼 닦아 놓았던 우리의 사업 토대는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혁명 정부는 일본 전통과의 광고 대리점을 용납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결별사」까지 공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문학의 세계로 쫓겨 돌아오고 말았다. 그 알량한 「부사장」이나마 나에게는 팔자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한 일을 회상할 때면 나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팔자 타령에 대한 이야기를 연상하게 된다.
옛날에 과부 팔자를 타고난 여인이 과부 신세를 면해보려고 두번이나 개가했으나, 번번이 남편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세번째 시집을 가려고 길을 나서니까, 웬 베옷을 입은 동자가 뒤를 줄줄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누구이길래 나의 뒤를 줄줄 따라 오느냐?』하고 물었더니, 그 동자가 『나는 당신의 팔자요!』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그 과부는 「과부 팔자」를 면할 수 없음을 그제서야 깨닫고 다시는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문학과 손을 끊으려고 세 번씩이나 문학을 배반해 보았으나 결국 내가 발을 붙이고 서 있을 땅은 문학의 세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배반심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죽는 날까지 문학만을 지켜나갈 생각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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