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6)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초대받은 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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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글납작한 얼굴에 안경을 쓰고 시종 웃음을 띤 겸손한 자세의 그 청년을 춘원은 우리에게 독일에서 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어제 귀국한 안호상씨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는 굵지 않은 음성으로 외국에서 돌아온 유학생답게 세련된 인사를 치른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주로 춘원과 주고 받으며 식사와 환담을 끝내고 돌아갈때는 안박사와 모양이 동반하여 무슨 음악회인가를 간다고하였다.
이날밤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들사이에는 우정과 애정이 급하게 진전되었던 모양으로 끝내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춘원선생이 중매한 셈이 된 것 같아 훗날 내가 그에게 물어본 일이 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되길 희망하시구 소개하셨던가요?』
『누가 저희들더러 결혼하라구만나게 해줬나? 그냥 알구 지내는게 좋을거 같아서 소개한거지.』
두덜대는 것처럼 그런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작가들에겐 참 솔직하고 순진한 일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모윤숙은 성북동 천로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집에 신접살림을 차려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은 몇사람을 저녁만찬에 초대하였다.
팔봉이 그 집을 알고 있어서 그와 동행하였더니 안박사가 새신랑답게 한복차림을 하고 주인노릇을 하느라고 상냥한 웃음으로 대청에서 손님을 맞아들이고 주부인 모여사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뛰쳐나와 그의 독특한 응석조의 어투와 쉰듯한(요새말로는 「허스키」) 음성으로 기름묻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아이 형님 어서 오세요. 나 이젠 이런꼴이 되어버렸다우』하는데 어찌된 일일까, 결혼 후에 처음 만나는 감회탓일까,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던 기억이 지금도 새로운 것이다.
방안에는 개벽사의 사장인 청오 차상찬씨와 이태준씨가 아랫목에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하였고 맨나중에 상허 이태준보다 훨씬 다듬어진 미남이 들어왔는데 그를 심훈씨라고 하였다.
상허는 『오몽녀』때문에 성명도 생소하지 않았고 『천사의 분노』『실락원의 얘기』 『구원의 여인상』등의 소설에서 그의 탁월한 재능에 호감이 갔을뿐더러 어떤 기회에서인지 이미 지면이 되어 있었다. 차씨도 두어번인가 만난적이 있는 숙면이지만 심씨만이 초대면이어서 누군가의 소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심씨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안경테를 한번 만지더니 이내 방바닥에 두손을 집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어 말했다.
『나 심대섭입니다. 글로는 숙면인데 처음 뵙게되어 죄송합니다.』
나는 얼떨떨해서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답례하는데 누군가가 심씨에게 소리쳤다.
『이사람아 덮어놓고 자천을 하다니. 그 버릇 여전하군.』
『척 보면 몰라서 덮어놓고야? 자네들처럼 둔감한 줄 아나? 안그래요?』
심씨는 내게 동의를 구하며, 처음부터 익살을 떨었고 남의 말끝마다에서 꼬리와 티를 잡아 묘한 말을 만들어내면 모두들 와하고 웃음을 터뜨려서 시종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기만 하였다.
당시에 심씨는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이니 『불사조』니를 심대섭이라는 본명으로 발표하였으나 1935년엔가 「동아일보」에 당선소설 『상록수』가 연재되면서부터 심훈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날밤의 향연은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데, 모윤숙은 시만 잘 쓰는게 아니라 음식 만드는 솜씨까지가 훌륭하여서 모든게 겸비한 여성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무렵 서해는 조운의 누이 분려와 (1927년쯤결혼)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인 성해 이탄감씨집 사랑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매일신보」의 기자인 서해는 내가 갔을때에도 병석에 있었다. 파란만장의 그의 일생이나마 길지 않을 듯 싶어 비참해지는 심경으로 있는 내게 성해는 「매일신보」에 집필을 강권하였다.
매월 8원씩 주겠다고 역설(그때 딴신문은 2원)하는 것을 내가 끝내 거절하니까
『후생이 가외로군』
하고 비꼬았으나 총독부의 기관지임을 꺼려 훗날까지 기고하지 않는 지조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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