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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149)-<제58화>문학자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예 일인지 시대(28)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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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 신문의「신춘문예」행사가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 행사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문인들이 배출된 것은 30년대 초 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무렵은 내가 한창 현역에서 문학활동을 하던 시대이기도 해서 그시절 신춘문예를 통해 등장한 작가들을 대개 기억할 수 있다.
우선 떠오르는 사람이 34년 조선일보에『모범경작생』으로 당선하여「데뷔」한 박영준이다. 나는 그가「데뷔」하기 전부터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앞에 이야기한「룸펜」시절에 나는 한때 가회동에 있는 이태우의 집에서 하숙한 일이 있었다. 이태우와는 송계월의 하숙방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가깝게 지냈는데 그의 어머니가 하숙을 하고 있던 관계로 얼마동안 이지만 그 집에 유숙하게 된 것이다.
이태우는 뒤에 중외일보사의 사회기자가 되어 이름을 날린 명기자이지만 그도 초기엔 문학청년 이었다. 그는 나를 따라 문학비평을 공부한다고도 했다. 34년 박영준이 등장했을때 이태우는 같은 신춘문예에 『문학유산의 계승문제』를 갖고 평론부문에 입선을 한 일도 있다.
이태우는 보성전문 학생시절에 벌써 결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되는 안정현은 일찌기 여상시절에 송계월과 함께 광주학생사건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검거된 일도 있는 여성이었는데 내게 대한 대우가 각별하였다. 그는 은행의 여사무원으로 있었다.
박영준은 연전을 졸업한 학생으로서「연전」이라는 흰 휘장의 사각모를 쓰고 자주 이태우네 집에 놀러 왔다.
이태우와는 양교간의 같은 문예반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가깝게 왕래하고 있는 모양 이었다. 어느 날 이태우가 박영준과 함께 내 방으로 건너왔다. 문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친한 친구간 인데 이제부터 나에게 지도를 받아야 겠다는 것이다.
첫 인상에 박영준은 그렇게 소박할 수가 없었다. 지내면서 더욱 그 인상을 짙게했다. 거의 말을 하지않는 과묵한 사람이기도 했다. 뒤에 그가 농민작가로서 이름이나기 시작했을때 나는 박영준을 가리켜 전형적인 한국의 농민 「타입」이라고 이름을 붙인 일도 있다. 그만큼 부드럽기만 해서 내 성격과도 통하여 처음부터 호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종의 문단선후배로서 사귀기 시작한 것이 33년 봄 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실은 그가 34년의 신춘문예에 내기 위하여 작품준비를 할 때에도 내가 미리 그 작품을 읽고 원고 끝에 참고의견을 부주한 사실도 있다. 그는 결코 재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었다. 그 대신 진실하게 성실하게 그야말로 농부와 같이 힘을 다하여 문학의 밭을 갈아가면서 농민작가로서 일관된 작가의 생애를 마친 사람이다. 이태우와 박영준과 나 세사람은 셋 중에 누구에게나 푼돈이 생기면 계동 언덕바지에 있는 중국집으로 가서 잡채와 배갈을 놓고 문학담에 꽃을 피우곤 했다. 내가 어렴풋하게 배갈맛을 감상하게 된 것도 그 시절의 일이다.
지금도 나는 술을 못하고 좋은 술의 맛이 무엇인지 감별을 못한다.
훨씬 뒤의 일인데, 그러니까 57년 여름에 내가 미국무성의 초대형식으로 신분에도 맞지않는 1등 비행기표를 얻어갖고 일등좌석에 앉아 있으니「스튜어디스」가「샴페인」을 권하고 다녔다.
첫 번은 멋모르고 한 잔 받아마셨는데, 별로 맛이 좋은 것 같지 않아서 두 번째 와선「샴페인」병을 기울이려고 했을 때 내가 손을 저으며 사양을 했더니『아니「샴페인」을 마다하는 분이 다있어』하는 표정으로 It's Shame! 이라고 하며 웃었다.
주도에 대한 내 경험은 그런 정도 밖에 안 되어 술맛의 진미를 모르지만 그중에 배갈술맛만은 지금 마셔도 그 혀끝을 짜릿하게 하는 독특한 맛이 제법 구미를 돋우는데 그것은 옛날 그 30년대에 박영준등과 중국집에서 즐겨마신 일이 있어서 그런 것 이었다.
박영준이『모범경작생』이라는 농촌소재의 작품을 갖고 신춘문예로 문단「데뷔」를 하던 것과 관련이 되는 문단화제가 되는데, 이것은 역시 당시의 외부정세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 때 국내의 문단은 특히 젊은 신인들이 작품취재를 하는데 있어서 도시적인 것보다도 농촌에서 소재를 취하는 경향이 특별히 눈에 띈 일이다. 신춘문예모집 이야기지만 그 때 젊은사람들이 응모해오는 작품들의 7O%에 가까운 것들이 모두 농촌소재의 것들 이라고 했다. 만주사변이후 그「파시즘」의 압력이 중시에서 가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젊은작가들이 도시를 피하여 농촌으로 간 것도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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