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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5)<제58화>문학사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문장」지 주변(44)|친일파 시비|정비석(제자 정비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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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왕 말이 난 김에 해방후인 만년의 김동인의 이야기까지 써 버리기로 하자.
해방 직후 임화·김남천 등의 좌익계열 문인들이 주동이 되어 소위「중앙문화건설협의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사무실을 종로「한청빌딩」에 두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내용도 잘 모르면서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가 새로 생긴다기에 8월18일에「문건」사무실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막 사무실로 들어서니 이태준이 김동인과 단 둘이 별실에 마주앉아 있었다. 김동인도 금방 들어선 참인지 이태준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었다. 이태준은 인사가 끝나자 김동인더러 『어제 현민(유진오)이 찾아 왔었는데, 임화가 현민더러 당분간은 근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그냥 돌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분위기가 그처럼 묘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선생님도 당분간 이런 데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더러도
『비석도 당분간 조용히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소.』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태준은 선배에게 그런 말하기가 무척 거북했던지,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하고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태준의 뜻이기보다도 임화·김남천 등 좌익계열의 뜻이었으리라.
김동인은 만지에「황군위문」을 갔던 일이 있었고, 나도 종전 직후 최재서가 경영하던「국민문학」(「인문평론」의 후신)에 일본말소설을 써서 친일파노릇을 했던 일이 있으니 물러가라는 뜻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 일로 먼지를 털기 시작하면 임화나 김남천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니 웃을 밖에 없었다. 이태준 자신도 일본어소설을 못 쓰니까 우리말로 쓴 소설을 일본말로 번역해 발표한 일이 있지 않은가. 아니나다를까 김동인은 그런 말을 듣고 곱게 물러갈 성미가 아니었다.
『모두가 합심해야 할 이 판국에 누가 누구를 가려낸다는 말이요. 그런 단체라면 나는 참가하지 않겠소. 더구나 비석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요.』
무자비하게 내쏘는 바람에 이태준은 어쩔 줄을 몰라 몹시 난처해하였다. 나는 물론 일본말로 친일적인 냄새가 풍기는 소설을 쓴 것이 결코 잘 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임정요인들이 들어와 그런 심판을 내리면 할 말이 없지만, 임화나 김남천 따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을 것인가.
김동인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매우 불쾌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왔다.
나는 뒤따라 나오다가 복도에서 이무영을 만났는데, 이무영은 다른 방에서 임화에게 우리와 똑같은 일을 당했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비석! 나 좀 봐요.』
이무영은 내 손을 움켜잡더니 다짜고짜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임화에게서 당한 일을 말하면서 이런 걱정까지 하는 것이었다.
『비석이나 나는 매국노의「레테르」가 붙게될 판이니, 그러면 글을 못 쓰는 것은 고사하고 자식들을 학교에도 못 보내게 될 것이 아닌가.』 무영은 워낙 소심한 편이어서 몸을 떨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소에 붙여버리면서 『지금 국내에서 글을 써온 사람으로 우리들을 심판할 사람이 누구냐』고 큰소리를 쳐서 무영을 위로하였다. 나는 누구보다 형편없는 약골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경우에는 제법 배포가 유한 편이었던 것이다.
그 후「문건」은 좌익화되어서 이태준은 본심이 아니면서도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임화 김남천에게 질질 끌려갔고 김동인과 나는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앓았다. 그리고 유진오는 문학단체에만 가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때부터는 붓을 꺾어버리고 건국이 되자 초대 법제처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워낙 미미한 존재였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문단 외 거물이었던 김동인을 친일파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 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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