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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6)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40년대 「문장」지 주변-제58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무 죄도 없이 유치장으로 끌려간지 만4개월 만인 40년 3월에 무죄석방이 되어 나오는 길로 나는 장질부사를 앓아 눕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인줄 알고 가까운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만 받아왔는데, 열이 40도쯤 올랐을 무렵에 정지용이 놀러 들렀다가 내 이마를 짚어보고 깜짝 놀라더니, 그 길로 시내에 들어가 참모병원장 박병래 박사를 모시고 왔다.
박병래 박사는 진찰을 신중하게 해보고 나서 옆의 사람들을 물리친 뒤에 나의 병은 「파라티푸스」라는 전염병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유치장에서 받아 가지고 나온 선물이었다.
일제시대에도 의사가 전염병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당국에 신고를 해야하였고 신고를 하는 날이면 영락없이 순화병원이라는 전염병 환자만 수용하는 병원으로 옮겨가도록 되어있었다.
그 병원으로 가는 날이면 열에 아홉까지는 죽어 나오기가 쉬웠다.
박박사는 그런 실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서 비밀리에 치료하도록 숨겨 줄 테니,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고 나와 정지용에게 말했다. 정지용과의 친분을 봐서 나에게 특별 혜택을 베풀어준 것이었다. 박병래 박사의 고마움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그해 가을까지는 건강을 회복하느라고 원고를 전연 못 썼는데, 시국이 점점 험악해짐에 따라, 일제가 조선·동아 양대 지에 폐간 명령을 내린 것은 그해 8월 10일의 일이었다.
그때부터는 우리말 신문이라고는 매일신보 하나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해 가을에 매일신보학예부장으로 있던 백철이 연재소설을 맡아보겠느냐고 하기에 나는 서슴지 않고 맡았다. 제목은 『화발다풍우, 인생족별리』라는 당시에서 따다가 『화풍』이라고 붙었는데, 그 작품은 내가 최초로 신문에 집필한 장편소설이었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인 까닭에 일부작가들은 매일신보에 집필하기를 꺼려했으나 나는 우리말로 작품을 발표할 수만 있다면 어떤 신문이나 잡지도 서슴지 않고 써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유일한 문예지였던 「문장」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고 말았기에 나는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해 여름에는 네 번째로 금강산에 다녀와서 장문의 기행문을 썼다.
나의 수필의 대표작처럼 일러오는 『산정무한』은 그때에 쓴 기행문이었던 것이다.
41년 가을로 접어들자 시국은 더욱 험악해져서 조선청년들을「지원병이이라는 명목으로 연방 뽑아갔을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 지원하지 않는 청년들은 닥치는 대로 징용하여 광산으로 보내버렸다.
나도 그냥 놀고 있다가는 징용으로 뽑혀나갈 우려가 농후하기에 매일신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신문기자만은 징용을 면제해주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매일신보는 징용을 면할 수 있는 도피처처럼 되어 있어서 저명인사들이 수두룩하게 많았다.
학예부장 백철과 사진순보 부장 조용만을 위시하여 평기자에 정인택, 조풍연, 조경희 화가에 이승만, 윤희순, 박성규 등이 있었다.
편집국장은 해방 후에 자유신문사장이었던 정인익이었고, 사회부장에 홍종인, 차장에 성인기, 지방부에 우승규 등이 있었다.
나는 사진순보 소속으로 조용만·이승만·윤희순·정인택·박성규 등과 함께 별실에서 편집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조용만·이승만 등이 모두 술꾼이어서 퇴근 시간만 되면 월탄 박종화가 매일같이 놀러오곤 하였다. 전쟁말기에는 술이 몹시 귀하여 한사람 앞에 술을 한「도꾸리」밖에 주지 않았는데, 박성규와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몫의 술을 더 얻어 마시기 위해, 술집에 갈 때면 으레 박성규와 나를 끌고 가곤 하였다.
그 덕택에 우리 두 사람은 공짜 저녁을 꽤 많이 얻어먹었다.
그 무렵 매일신보에 『다정불심』을 연재 중이던 월탄은 두주를 불사하는 대주호여서 술만 생기면 우리 일행을 창신동 자택으로 초대하여 성찬을 베풀곤 했었다.
사진순보의 편집을 맡게되자 나는 이광수를 고정 필자로 정하고 열흘에 한번씩 효자동 자택으로 직접 찾아가 원고를 받아다가 호마다 그의 글을 책머리에 실었다. 그런 관계로 2년 가량 이광수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지원병 권장연설을 다닌 관계로 그는 일부인사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고있던 시절이었는데 그 무렵 그의 사상과 사생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쓰기로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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