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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155)<제58화>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30년대 문단일인명시대(3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출감
12월21일 아침 간수장이 감방복도에 와서 석방되는 사람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내 방의 「호오지끼」(보지기)가 떨어졌다. 「록뺘꾸하찌주규고오」 (689호)!. 석방된 사람들은 형무소장실로 불려가서 일장훈시를 들었다. 형무소안 일에 대해서는 일체 밖에 나가서 발설해선 안된다는것.
형무소로 와서 꼭 1년만에 이 붉은 성문을 나서게 되었다. 섣달그믐께여서 날씨는 쌀쌀했고 하늘도 찌뿌둥하게 흐려있었으나 성밖의 공기는 그렇게 맑을 수 없었고 기분도 상쾌하기만했다.
문앞에서 기자들이 기다렸다가 출감소감을 「인터뷰」 했다. 『좋은 인생수업을 했다. 별로 후회같은 것은 하지않는다…』 와 같은 말을 남기고 걸어가는데 동아일보지사장이 따라와서 본사의 지시라고 하면서 동아일보에 출감소감을 3회분 정도 써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상경하는대로 곧 사와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뒤에 내가 동아지에 써낸 출감소감이라는 것이 소위『비애의 성사』 라는 감상적인 수상문이었다.
이때의 일을 회상하면 나는 젊었을때 무척 「저널리즘」 의 인기 같은 것에 처세적인 신경을 쓴 일종의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게 말해서 기회를 포착하는데 민감한것 같은
말하자면 천박한 인생논같은 것인데, 사람에겐 살아 가는데 및번의 기회가 있는 법. 그때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첩하게 붙잡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약삭빠른 생각을 한것인데 문학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때마다「저널리즘」을 타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감때 신문사측의 내게대한 관심도에 민감했던 것도 2년 가까이 문단에서 내 이름이 잊혀졌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루속히 그 인기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재빨리 동아지에 출감소감을 써 낸것도 그런 심산이었다.
또 출감을 해서 바로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 평북의 고향으로 가지 않고 경성에 중문하차를 해서 몇달동안이나 처져있으면서 이것저것 시간적인 문학논을 서둘러서 발표한 이유도 그런데 있다. 만일 감옥에서 나와 바로 시골로 가서 초야에 묻혀 있으면 혹시 내이름이 「저널리즘」 의 경쟁에서 낙오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실로 『마음의 여튼자여』 (김동인의 작품명)의 생각을 했던 것같다.
지나치게 「저널리즘」 을 의식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것은 옥중이야기 이전의 일이다. 한때 「앙드레·지드」의 전향설이 세계의「저널리즘」 을 풍미하던 무렵 내가 재빠르게 「지드」 의『전향론』을 조선일보에 써낸 일이 있다.
그때 학예부에 김×임이 있을때인데 그는 내게 『백선생은 언제부터 그렇게「지드」를 알고 있었소』라고 말했다. 이것은「지드」의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그런 3면기사식의 문단시감을 써내느냐하는 힐난의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같은때의 이야기라고 기억하는데 평북 의주출신의 박완식이란 문학평론가가 있었다. 그가 방응모사장의 줄을 타고 조선일보에 입사해 있을때다. 나를 보고 역시 빗대놓고 말하듯이『백형은 문학자보다도 신문기자를 했으면 더 좋을뻔했어요. 하옇든 그때마다 시사적인 새 「뉴스」에 재빨리 손을 쓰는 데는 제일 가더군!』 하고.
이런 것들이 모두 내가 젊었을때 어떤 문학적인 처세를 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자기 나름의 반성을 해보는 지나간 자료들인 것이다.
출감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22일 아침 일찍 나는 경성역에 내렸다. 이른 새벽에 찾아갈 곳이 어디 있으랴. 우선 역전의 여관에서 아침을 쉬고 오후에 종로로 민중의원엘 들렀다. 다들 반겨주었다. 오래 고생을 했다고 특히 유석창원장이 기뻐해 주었다. 그런데 숙사는 어떻게 하시기로 했소』하고 유씨 편에서 물었다. 내가 대답을 미처 하기 전에 『백선생, 그럴것 없이 우리집에 당분간 더 와 계시지요. 백선생이 좋으시다면 말입니다. 계시던 방은 그대로 비어있어요.』하고 자진해서 말을 했다. 고마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 친절을 물리칠 겨를이 어디 있었으랴. 그날부터 얼맛동안 다시 유씨집으로 가서 지내기로 했다. 유씨 부인은 몹시 내외를 하는 분이었으나 그래도 내 옥중의 고생을 위로하는 수줍은 인사를 하면서 이 불청객의 재방문을 바겨주었다.
그날저녁 나는 고향의 자형한테 편지를 썼다.
『이 못난 동생이 출감했다는 사실은 아시고 계실줄 압니다. 지금 경성에 와서 잠시 머무르고 있습니다. 나왔으면 곧 돌아가 늙으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불효자식의 사죄를 올림이 마땅하겠사오나 역시 여기서 볼일도 좀 있어서 이렇게……. 』 하고.
이튿날이 바로 「크리스머스·이브」. 그날밤 나는 옛친구 최재숙과 함께 인사동거리를 지나 종로바닥을 걷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크리스머스·이브」의 거리 풍경이 요란하지는 않았으나 그 나름대로 「화이트·크리스머스」의 낭만을 느끼게하는 것이 있었다. <계속><화자 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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