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마음 따뜻하고 부드럽게 하는 달항아리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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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4면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최근 에세이 『영혼의 미술관(원제:치유로서의 미술)』에는 서구의 다양한 고전·현대미술 작품과 더불어 조선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등장한다. 작가는 표면에 작은 흠도 많고 부분적으로 변색되고 윤곽선도 컴퍼스 곡선처럼 완벽하지 않은 그 달항아리가 “겸손(modesty)의 이상”을 보여 준다고 했다.

힐링이 있는 백자전시회

“이 항아리가 겸손한 이유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여서다. (중략) 항아리는 궁색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존재에 만족할 뿐이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매화 가지’. [사진 서울미술관]

즉 달항아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내보이며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비판에 안달하지 않는 의연한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드 보통은 영국에서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갈 길을 제시해 주는 미술작품들을 가장 좋아합니다. 내 삶이 그런 작품들의 타고난 모습을 닮길 원합니다. 대영박물관에서 한국의 달항아리를 봤을 때 그걸 느꼈죠.”

드 보통의 말은 한국 현대미술가 강익중이 “달항아리는 순수하고 당당해서 좋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외국 문인까지 한국 예술가들의 극진한 달항아리 사랑에 가세한 셈이다. 달항아리만큼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가들이 즐겨 주제로 삼은 오브제가 또 있을까.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김환기의 달항아리 사랑은 유명하다. 여러 반(半)추상적 그림에서 푸른 하늘에 보름달처럼 둥실 떠 있는 달항아리를 묘사하곤 했다. 또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 둔 크고 잘생긴 백자 항아리의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 말을 전한 미술사학자 최순우 역시 달항아리를 사랑했다. 그는 “원(圓)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모두가 한목소리로 달항아리를 예찬하는 데서 심술궂은 저항감을 느껴서인지 몰라도 나는 달항아리를 그렇게 좋아한 적이 없다. 사실 이유가 따로 있다. 달항아리가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부정할 길이 없지만 그에 따라다니는 수사들, 즉 드 보통이 말한 ‘겸손,’ 최순우가 말한 ‘욕심 없음’과 ‘꾸밈 없음’ 등이 한국적 미(美)의 대표로 고정되는 게 싫기 때문이다.

한국적 미를 백색의 미, 비애의 미,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미, 소박미 등으로 보는 시각은 일제시대 조선 백자와 민중 공예에 심취했던 일본의 미술이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에서 비롯됐다. 그 후 많은 한국 미술사학자가 야나기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야나기가 ‘소박미’를 강조한 게 한국 미술을 장려하지 못한 것으로 폄하해 일본 제국주의에 영합하려 한 의도 아니었느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야나기가 사회주의적 성향으로서 일본에서도 민예운동을 일으켰음을 감안하면, 그런 의도는 아니었으리라.

다만 나는 한국적 미가 꾸밈 없음과 담백함에만 초점을 맞추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고 생각해 야나기식 미학에 찬성하지 않을 뿐이다. 신비로운 우아함과 정교함의 극치인 고려 불화도 한국의 미가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달항아리만 너무 조명을 받는 것 같아 떨떠름했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충격과 우울함에 빠져 있는 지금, 나 역시 지친 마음으로 요즘 진행 중인 미술 전시들을 돌았을 때 왜 그토록 달항아리가 사랑받는지 갑자기 깨달을 수 있었다. 부암동 서울미술관의 ‘백자예찬’전에서 김환기, 강익중 및 다른 작가들의 달항아리 그림과 설치미술을 봤을 때, 가나아트센터에서 고영훈의 달항아리 극사실회화를 봤을 때, 또 호림박물관 신사동 분관의 ‘백자호(白磁壺)’전에서 한 무리의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만났을 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차갑지 않은 하얀 빛에 마음이 따스해졌고 그 풍만한 둥근 형태에 마음이 부드러워졌고, 그 ‘무심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평정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드 보통이 『치유로서의 미술』에 달항아리를 포함시킨 것은 참으로 날카로운 감각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여전히 나는 달항아리식 아름다움이 한국적 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달항아리가 지닌 그 어진 치유와 위로의 힘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슬프고 아픈 이때, 눈으로 달항아리를 끌어안고 그 온기를 받아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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