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위질 당하나…속기록의 수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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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초와 같다』는 국회 속기록. 여야 의원들의 발언을 글로 녹음한 속기록이 본인도 모르게 대량삭제의 수난을 당해 야당이 들고일어났다.
오세응 의원(신민)이 지난 5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내가 지난 76년 11월4일 외무위에서 박동선 사건에 대해서 한 발언 중 상당부분이 삭제됐다』고 한데서 발단, 신민당은 삭제범위 조사와 관련자 문책 등 공세를 펴고 있고 여당은『국회법에 따라 삭제가 가능하다』는 법리를 내세워 맞서고 있다.

<법사위 소속은 전원 삭제>
신민당 의원 중 발언내용이 전부 또는 일부가 속기록에서 삭제된 것으로 밝혀진 것은 김인기·김명윤·이택돈·한병채 의원 등 법사위 소속 전원과 외무위의 이철승·오세응 의원 및 정일형(전 의원)씨, 내무위의 노승환·박한상·황낙주 의원, 문공위의 신도환·최성석 의원, 보사위 한영수, 국방위 송원영 의원 등 모두 14명.
법사위의 박한상·이택돈 의원은 발언내용 전부가 삭제됐으며 김명윤·김인기·한병채 의원 등은 일부분이 삭제됐다. 야당의원 주장에 따르면 전문삭제는 김대중씨 사건과 관련된 문제들.
외무위에서는 박동선 사건·청와대 도청사건이, 내무위에서는 구속 자 문제, 문공위에서는 학원사태 발언들이 삭제대상이 됐다는 야당의원들의 말.
제94회 정기국회법사위 회의록(75년 11월6일자)중 일부를 그대로 소개하면-.
『○위원장 장영순 이택돈 위원 발언하세요.
○이택돈 위원-·-·-
○위원장 장영순 말씀하시지요.
○법원행정처장 김병화 이택돈 위원께서 말씀하신 데 대해 저는 제가 이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백히 어떤 답변을 드리기에는 저로서는 지극히 어려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중략…대법원장에게 말씀 드리고, 저로서는 모든 것이 이 위원 님이나 여러 위원들의 의견에 쫓아서 처리 되도록 대법원장님한테 진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양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한상 위원-·-·-
(-·-·-한 부분은 위원장이 개재하지 아니하기로 한 부분이므로 삭제).』

<외국대학 등에도 배포>
현재 본 회의록은 1천4백50부를 작성, 의원 1명당 3부씩을 포함해 국회 내에서 9백49부를 소 화하고 나머지는 사법부 및 중앙 행정부서·검찰청 및 도 경찰국·헌법 기관·금융기관·언론기관·정당·사회 단체·공공 및 대학도서관이 배포선.
특히 본 회의록은 교환 형식으로 국외로도 30부가 나가고 있고 이 가운데도「프린스턴」 「케임브리지」「옥스퍼드」「하버드」및 동경대학 등 유명대학의 도서관에 1부씩 보내지는 외에 대형 박물관에도 2부가 보내지고 있어 이채.
그러나 각 상임위 회의록은 5백50부만 작성, 국회에서 4백30보를 갖고 나머지는 사법부· 행정부·헌법기관 등에만 국한해 배부하고 있고 언론기관에는 배부가 안 되고 있는 실정.

<72년부터 규정 대폭 강화>
8대까지는 삭제를 당한 발언은 △비밀을 요한다고 의결한 부분이나 △의장이 취소하게 한 발언(회의장 질서 문란·국회위신 손상). 그러나 72년 국회 해산 후 새로 마련된 국회법은 삭제 규정을 대폭 강화했다.
국회법 제1백11조는「비밀」과「취소 발언」이외에「의장」이 국가의 안전보강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한 부분도 회의록에 게재치 않도록 규정해 놓았다.
「국가의 안전보장에 위 해가 되는 언동」은 아예 발언 중 경고·제지·「마이크」차단·속기 중단케 됐고(국회법1백42조) 국가원수·국무총리·국무위원·정부위원 등의 모욕이나 사생활 언급은 징계대상(국회법 l백43조)으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75년 헌법개정논의 금지, 긴급조치 자체의 비방 금지를 내용으로 한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자 면책특권을 허용 받아 행하여질지라도 이에 해당하는 의원들의 원내 발언은 일부가 삭제돼 왔다고.
회의 도중 의장이나 위원장이 발언제지 또는 취소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도 회의가 끝나면 속기 관계자들은 국회법과 긴급조치 저촉여부를 분간하여 의장·위원장의「사인」을 받아 발언을 삭제해 오고 있는 실정
제헌이후 초기 국회에선 발언삭제 말썽은 없었으며 다만 어떤 발언이 문제가 되어『그런 발언을 한일이 없다』느니『했다』느니 하는 시비가 벌어졌을 때 속기사가 의장의 지시로 본회의 발언대에 나가 속기록을 낭독했을 정도(김진기 국회속기 과장의 말).
상임위원회 회의까지 속기를 한 것은 4·19이후 제5대 국회 때 이후.
6·25전쟁 때 국회문서를 부산으로 옮길 때에도 속기록만은 전부 짊어지고 내려가 제헌이후 전 회의록이 보존돼 있다.

<야당선 정치공세 준비>
야당의원 발언삭제와 관련, 신민당은 상위에서 대대적인 청치 공세를 펼 예정이나 장영순 법사위원장 같은 이는『김옥선 의원의 체제 비판 발언으로 인한 파동 이후 의원의 발언이 신상문제로까지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말하고 있어 이 문제를 둘러싼 여-야 공방이 주목거리.
대부분의 신민당의원들도 속기록은 △역사의 기록 △정치인 언행록 △의회 선례 문헌이라고 주장.
한병채 의원 같은 이는『역사의 기록을 삭제한 사람은 연산군과 진시황밖에 없었다』고 했으나 여당의원들은『법에 따르는 조치인 만큼 무법 발언은 가위질이 가능하다』고 반론.
국회 사무처는 속기록 삭제 말썽 후 속기록 개선방안을 마련.
국회 보관용 속기록 원본만은 별도로 인쇄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보관용 원본과 삭제 결정된 부분은 공란으로 해 놓는 배부용을 따로 발간하자면 비용이 2중으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배부용 속기록을 인쇄한 후 보관용으로는 삭제 내용을 공란 부분에 별첨해 원본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지난번 국회 대정부질문 때 송원영 신민당원내 총무가『속기록 원본도 문제발언을 삭제했다가 속기록 말썽이 생기자 삭제됐던 내용을 붙여 놓았다』고 비난하여 더 이상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관용을 삭제부분 없이 별도 인쇄키로 했다. <주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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