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시 같은 명구연 대시인의 진면목 뚜렷|영국시인 스펜더와의 1주일…이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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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떤 예술가든지 그들의 작품을 대했을 때와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다소 느낌의 차이를 주게 된다. 좋은 의미일수도 있고 나쁜 의미 일수도 있다.「스티븐·스펜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7일 오전, 강연회의「페이퍼」준비도 하지 않고 박물관 구경을 가겠다고 저고리 단추를 끼우고 나서는 그를 봤을 때 그의 지적 및 인종적인 한국에 대한 자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12시까지 강연준비를 하게 되었고 그의 부인만이 필자와, 모윤숙 회장과 함께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부인은「스펜더」씨가 고궁을 매우 싫어하고 박물관만 좋아한다고 말하여 또 한번 그의 대영제국 적 전통의식과 사회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근엄하고도 노숙한 태도는 가는 곳마다 겸허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보였지만 그의 언어의「리듬」과「톤」을 느끼게 해주는 영국적 전통의 우월성이 미국 시인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국립박물관과 이대 박물관, 그리고 경주 민속박물관 등에서 고려 및 이조도자기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면서「원더플」,「마빌러스」를 연발하는 모습은 미지의 옛 문화에 대한 찬탄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심사장에 나온 국전그림을 보고 그는 한국인에 대한 약간의 인식을 갖는 듯 했고, 박종화 예술원장 댁에서 목판·금속판의 고기를 볼 때는 조금 외경 스러운 안색을 띠는 듯도 했다. 이대 김옥길 총장 댁에서 오찬 때, 김용권 교수(서강대)와 필자와「스펜더」씨 사이에서 벌어진「에즈러· 파운드」의『칸토스』에 관한 화제 등으로 미루어 그가 박종화 선생의 한 서적을 보고, 「한문학」이라는 「이미지」의 학문에 일종의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일정을 마치고 나서 그는 필자에게 한국의 전통문화가『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시사했다.
사회 및 정치에 관한 암시적 질문을 그는 거의 가는 곳마다 받는 듯했다.
그 까닭은 그의 시가 사회적·정치적인 현실가치에서 출발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강연 『T·S·엘리어트』 (통일원강당·17일)는 준비가 미흡했지만 그런 대로 세계적 시인으로서의 관록을 과시했다.
그는「엘리어트」의 초·중·후기 작품의 분석을 통해서 소위「엘리어트」의 탈 자아 적인 주인공이라는 주제발전이 문명적 붕괴라는 사회와 양립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은근한 풍자의 암시를 보냈다. 그러한 여운은 「엘리어트」가「스펜더」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이냐』라는 송 욱(서울대)교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역력히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우문현답 같은 질의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영문학 지식에 대해서 그가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19일 오전 이대에서의『시인의 역할』이라는「채플·스피치」는 대학의「에세이」교재의 일편을 연상시키는 명 강의였다. 4천여 명의 여대생이 행하는 오찬기도회와 김옥길 총장의 다정스런 권위가 더욱 분위기를 북돋웠다.
오후 서울대에서의『「W·H·오든」과 1930년대』에 관한 강연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종의 서사시 풍 적인 어조로서, 자기자신의 시적 경험을 곁들인 대시인의 긴 면목을 발휘했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시간에 그는 약간 노기의 붉은 빛이 비치며 음조를 높였으나, 앞에 앉은 필자와「윙크」를 교환하면서 대시인다운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필자=국민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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