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직 구체적 실적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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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카터」미대통령은 지금도 여행 중에는 양복보따리를 손수 들러 메고 다닌다.
휴가를 얻어서 고향에 내려가면 여전히 청바지차림으로 산책을 즐긴다. 그는 취임식 행진 때 「펜실베이니아」대로를 걸어서 백악관까지 갔고 부활절 휴일 때는 손자를 무동 태워 군중 틈에 끼였다.
「카터」의 이런 거동을 어떤 사람들은 연극이라고 지겨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극까지는 아니라도 일국의 대통령이 노변정담을 한답시고 「카디건」차림으로 TV앞에 나와서야 지도자로서의 체통이 서느냐고 비판을 한다.

<계산 없는 행동 안 해>
「컴퓨터」라는 별명을 듣는 「카터」가 아무 계산 없이 그런 서민적인 대통령의 인상부각에 열중했을 리가 없다.
취임 3개월 후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라는 것을 보니 72%의 지지표가 나왔다. 그 인기도는 취임 후 같은 기간에 「아이젠하워」가 받은 74%, 「케네디」가 받은 83%, 「존슨」의 73%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나 「카터」가 「워싱턴」정계의 신참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72%의 인기는 그렇게 낮은 평가도 아니라는 평이다.
결국 「카터」가 서민대통령의 인상을 팔면서 국민들과 직접 전화대화를 갖고 국민들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여 온 것은 언론과 의회의 머리 너머로 「워싱턴」에서는 인기가 없는 정책을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판단된다.
인권을 강조하는 도덕외교, 「쿠바」와의 관계개선, 새로운 핵 전략 무기 감축제안, 새로운 중동평화제안, 경기촉진을 위한 경제정책, 그리고 지난주의 「에너지」제안이 바로 그런 정책이다.
정치 교과서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것 같은 「카터」의 통치방법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구구하다.
「워싱턴·포스트」의 부주필 「맥그린필드」는 「카터」는 의전과 형식을 외면하는 「스타일」때문에 저항을 받고있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월11일 전국적인 「카터」평가를 보도하면서 「카터」정책의 내용을 평가하기는 시기상조지만 『「스타일」은 인상적인 지지를 받고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의 「워싱턴」지 국장 「헤드릭·스미드」기자도 「카터」가 취임 1백일 동안 가장 성공한 분야는 형식을 따지지 않는 자연스럽고 개방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대중적인 지지의 기반을 넓힌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평가 시기상조>
그러나 비판자들의 주장은 만만치 않다. 내일의 「월터·리프먼」으로 촉망을 받고, 금년의 「퓰리처」상을 받은 35세의 「칼럼니스트」 「조지·윌」은 4월24일 「워싱턴·포스트」의 「칼럼」에서 『1천4백60일 동안 계속될 항해에서 이제 겨우 1백일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여객들과 심지어는 일부 선원들까지도 선장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조지·윌」은 특히 「카터」의 「에너지」제안을 염두에 두고 이상주의의 간판을 가지고 대통령이 된 「카터」가 지금 미국이 현실주의로 돌아갈 시기가 왔다고 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취임 1백일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서 「카터」비판이 반드시 추상적인 것은 아니다.
외교정책에서는 「카터」가 소련의 반응을 오산하고 「브레즈네프」에게 인권과 SALT(전략무기제한회담) 제안을 함께 내밀었다가 정면으로 거부당한 사실이 두고두고 논객들의 희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권을 강조하면서 안보상 중요한 지역은 예외로 하고있는 입장도 일관성 없는 「카터」정책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국민 한 사람 당 50「달러」씩 세금을 환불하겠다는 선거중의 공약을 철회한 것은 비판정도가 아니라 조롱을 받고있다.
「카터」는 『고집불통의 「조지아」두꺼비』라는 별명을 듣는다. 「조지아」주지사 시절의 「카터」와 백악관의 「카터」는 한결같이 권력 독점적인 대통령으로 「나폴레옹」황제같이 불가능을 용납하지 않은 인물로 이름났다.
「크래프트」의 생각으로는 「카터」는 지금까지 지엽적인 이해 관계를 앞세운 국회의원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베트남」에서 물러나라. 그러나 전쟁에서 지지는 말라』고 말하는 투로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레트」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추상적인 여론을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의회의 반발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비정형의 이상주의>
「제임즈·레스턴」은 「카터」는 「유머」감각은 없어도 역사감각은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카터」는 「조지·윌」같은 사람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기의 진보주의자들의 순진한 이상주의에서 「에너지」위기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대통령의 『사회·정치공학』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불가피한 것 같다.
「뉴욕·타임스」의 「헤드릭·스미드」는 「카터」대통령을 정치적인 온건논자, 경제적인 중도주의자, 「우드로·윌슨」같은 인권옹호논자라고 평가하지만 「레스턴」에게는 집권1백일의 「카터」의 정체가 아직도 확실히는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레스턴」의 결론적인 「카터」평가는 「카터」의 정체같이 감정적이고 추상적이다.
『「카터」는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소심하게, 자기 자신도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이상을 향해서 움직인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수주간의 실적으로 그가 행진의 선두에 서고있다는 사실하나는 분명하다.』
결국 「레스턴」의 말은 「카터」가 대통령이라는 것은 확인됐지만 어떤 대통령인지는 분명치가 않다는 의미다. 【워싱턴=김영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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