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했던 소창 논문 논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무애는 나보다「와세다」대학의 여러 해 후배로 학생시절에는 서로 교류가 없었고 일제말기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애가 평양의 숭실전문 교수로 있을 때다. 그는 내게 만지장서의 편지와 더불어 한편의 논문을 동봉해 온 것이 그것이다.
지금 기억하기로 그는 그때 30대소장의 영문학자인데 그 편지는 정말 깜짝 놀라게 했다. 시종 한문으로 묵 서한 그 편지는 유창하기가 노사숙유의 한문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뒤에 직접 만나 그 궁금함을 물어 봤지만 단지 그는 어려서 조부한테 배웠을 뿐이라고 했다. 한번은 내 집에 와서 한 적을 함께 펼쳐 보는데 내가 두줄 읽으면 어느새 10줄을 읽어 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독파였다.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천재적 두뇌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
그때 보낸 논문은 신라 향가중의 원왕생가에 대한 연구로 청구학총에 발표되었다. 아마 그것이 무애가 발표한 첫 국문학 관계 논문이었을 줄 안다. 영문학자가 향가연구를 깊이 했다는 사실도 대견하지만, 특히 그 논문은 선학인 일인학자 소창진평의 논문에 정면으로 도전, 그 결정판을 냈다는 점에서 학계의 화제가 됐다. 통쾌한 일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의 향가연구는 깊이가 더해 청구학총과 진단학보 등에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조선고가연구」라는 커다란 공적의 저서로 묶어진 것이다.
무애는 내가 알기 전에 시인·평론가로서도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의 문단활동은 2년께 에서 35년경까지 이어지는 짧은 시기였지만 그의 시 세계의 특징은 30년에 간행한 그의 시집『조선의 맥박』의 표 재가 나타내는 것처럼 민족과의 정신적 연대성, 그리고 가요 적인 서정성에 바탕을 두었었다.
그가 29년 발간한 순 문예지『문예공론』에 실린『문예상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보면 이 같은 그의 문학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그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절충주의 적 문학론을 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명은 역시 고전, 특히 향가연구와 그 저술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돌이켜 보면 그의 여러 가지 공적 중에서 진짜 전문은 국학이었다. 고가연구에 이어「여요전주」도 내놓았는데 그런 일련의 연구는 그의 명성을 길이 남겨 주게 할 줄로 안다.
그는 신변에 숱한 일화를 남기고 갔다. 천재는 광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 그의 성미가 급함이라든가, 거품을 품으며 폭포같이 쏟아 놓는 달변이 새삼 눈에 어른거린다.
근년에 사석에선 별로 같이 하지 못했지만 학술원회의 때 가끔 만나 보면 그는 늙지 않는 정신력을 항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애는 갔다. 모두 한 방울의 이슬이다. 명복을 빈다.
이병도<필자=학술원 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